여행/종가 둘러보기

청주한씨 한준겸 종가

렌즈로 보는 세상 2011. 5. 15. 21:45



경북북부 지방의 종가 어른들을 만나빕고 사진을 찍던 내가

서울에 많이 살게되면서

서울이나 경기도 종가들을 둘러보기로하고

첫 번째로 찾은 곳이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의 서평부원군 한준겸선생의 종가이다.

 

내가 종가를 찾은 주목적은 인물사진 촬영을 위해서지만

첫 걸음에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십사고 말씀드리기가 죄송해

이번에는 인사만 드리고 찾은 이유를 말씀드리고

다음에 그분들도 시간이 되고 나도 시간이 되는 날에 촬영하기로 했다.

 

그러나 꿩대신 닭이라고

인물사진은 못찍어도  그냥 올 수 있나

종가와 한준겸선생의 묘역을 둘러보고 몇 컷 촬영해 왔다.

 

조선 16대 왕 인조의 장인이자

문신으로 추앙받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선생의 종가는

서해안 고속도로 군자나들목 부근에 있다.

1994년 서해안 고속도로가 종가의 선산을 가로지르면서

종가와 묘소는 반으로 갈라졌지만

그때 받은 보상금으로 쓰러져가는 옛종가를

반듯한 건물로 다시 지었다.

 

한준겸 종가는 종택건물은 오래되지않아

볼거리가 많지 않지만

종택 뒤 선산에 있는 한준겸의 가족 묘역이 볼만하다.

 

한준겸은?(1557-162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아버지는 판관(判官) 효윤(孝胤)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주서·전적 등을 역임했다.

1589년 금천현감(衿川縣監)으로 재직하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전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1592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원주목사를 지냈으며,

1595년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이 되었다.

1597년에는 동부승지로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전란 수습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우승지·경기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사도체찰부사(四道體察副使) 등

 지방관과 군직(軍職)을 두루 역임하며

전후의 민생안정과 군무수습에 기여했다.

 

1605년 호조판서를 거쳐 대사헌·한성부판윤 및

함경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함경도관찰사 재직시에는 〈소학〉·〈가례〉 등을 간행·보급했다.

 

선조 말년 후사문제를 둘러싸고

광해군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자

유영경(柳永慶) 등과 함께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선조의 임종시 유영경·한응인(韓應仁)·신흠(申欽)·허잠(許箴) 등과 함께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았다.

이때문에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다.

이후 대북정권이 계속되면서 1617년에는 충주로 부처(付處)되고,

1621년에는 여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해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크게 일어나

국경수비가 위태로워지자,

이를 방비할 적임자로 뽑혀 유배에서 풀려나고

지중추부사 겸 5도도원수로 임명되었다.

이어 의주로 부임하여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하는 등 여진의 침입에 대비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그의 딸이 인렬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영돈녕부사가 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피난하자,

호위대장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따라 전주까지 갔다.

저서로 〈유천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백과사전-



 

종가의 대문채



 

종가의 사랑채이자 안채

내부를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종손 내외분이 살고있다.

종부님의 손길이 바지런한 모양이다.

집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조촐하지만 깔끔한 장독대

안주인의 솜씨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주인 어른들은 종가 마당을 아주 예쁘게 꾸며놓았다.

멀리 보이는 현대식 대문이 종가의 현주소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도 깔끔하다



서평부원군의 신위를 모셔놓은 사당 문익사



 

사당 담너머에 서있는 벚나무는 이제 마지막 봄을 노래한다.



 

사당 옆에는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사당 부근이나 묘소 옆에 유난히 많이 핀 제비꽃

제비꽃 꽃말이 겸양과 성실이라고 한다.

이 종가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종가 사당 동북쪽에 자리한 가족묘

현재 종손의 윗대 조상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만들었다

이제 종가도 변모하고 있다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종가에서 나와 마을 뒷산쪽으로 10여분을 걸어가면

서해안 고속도로 옆에 한준겸의 가족묘역이 있다

조선 중기의 장묘문화를 한 눈에 볼수 있는 한준겸 가족묘역

가장 오른쪽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의 묘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한회일(韓會一, 1589~1642 한성좌윤) 묘와 (합장)

우측에 손자 한이성(韓以成, 1602~1634) 묘(합장),

그리고 바로 앞쪽에 증손인

한두상(韓斗相, 1627~1687 돈령부 판관) 묘(합장)가 함께 조성된 4대에 걸친 묘역이다.

한준겸의 시호가 문익(文翼)이므로 그의 후손들을 문익공파라고 칭한다.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 163호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 산62-4 소재)>

 

한준겸 묘는 회산부부인 황씨와 합장이며 석물은

묘표(죽은 사람의 행적을 적어 돌에 새겨 묘옆에 세움)ㆍ

장명등(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쫒는 등)ㆍ

상석(제물을 차리기 위해 묘소 앞에 마련해놓은 돌상)ㆍ

향로석(향로를 올려놓는 돌상)ㆍ

혼유석(넋이 노는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과 묘 사이의 직사각형 돌)각 1기,

문인석(묘 앞에 세우는 문신 형상의 돌),

망주석(묘 양 옆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동자석(사내아이 형상으로 묘 앞에 세우는 돌) 각 1쌍이 있다.




 

 

서평부원군 묘표

묘표는 월두형 비신과 기대로 이루어졌고 인조 6년(1628)에 건립되었다.



 

서평부원군 문인석



 

 

다양한 문인석들로 묘역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묘역 옆에 있는 한준겸의 신도비

푸른돌로 만들어 생동감이 넘치고 조각도 뛰어나다.

비문은 월사 이정구가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다.

규모는 이수가 1.42m×67cm×70cm,

비신이 1.12m×37cm×1.12m,

귀부가 3.9m×2.4m로 총높이 3.35m의 대형이다.

장대한 귀부에 푸른 빛이 감도는 대리석 비신과

생동감이 넘치는 이수의 조각,

안정감 있는 비례감각 등

조선 전기의 양식에 따라 조성한 훌륭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이 신도비는 한준겸의 묘역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여m 떨어져 있었으나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1994년에 현 위치로 옮겨져 왔으며 이때 비각을 세웠다.




 

한준겸의 묘역 주변도 제비꽃이 지천이다.

다시 한 번 제비꽃의 꽃말을 생각해본다.

겸양과 성실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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