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부곡

아버님 전상서

렌즈로 보는 세상 2007. 5. 1. 14:52

  立秋를 갓 지난 요즈음에 어울리지 않게 스산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먼 길 떠나신지 이레째,

이제 벌나비떼 잉잉거리고 파아란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평화로운 곳에 安着하셨겠지요? 

이승의 저는 이레 전 아버님의 싸늘한 손을 부여잡고 흐느끼던 그날의 모습에서 멀어져

평온한 日常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버님!

 당신과 제가 父女의 因緣으로 만난지도 어느덧 마흔 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당신을 아버지의 因緣으로 만나게 해준 신께 感謝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코흘리게 어린 시절 얼음 논에서 파아랗게 언 손을 불며 썰매를 타다가 해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

 당신은 언제나 가마니 짜던 따스한 두 손으로 저의 코를 닦아주시고는 따뜻한 당신의 자리를 내어 주시며

피곤한 제가 잠들 때까지 四書三經을 읽으시고 漢詩를 읊으시는 자장가를 멈추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장가는 이 세상 누구도 하지 않는 자장가일 뿐만 아니라

저희 9남매의 마음에 安息을 주는 呪術이었습니다.

 

 아버님!

 제가 조금 더 자라서 初等學校에 입학하여 6년을 다닐 동안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농사일로 피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저녁마다 그날 學校에서 배운 것을 물어보시고

그 단원의 요점을 잡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얀 칼라에 검정 교복을 입은 中學生이 되었을 때

당신은 당신 膝下에 처음 두어보는 制服의 少女를 무척이나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읍내에서 자취를 하다가 土曜日 오후 설레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당신은 그 밤 이슥하도록 學校生活을 물어보고 듣길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날 저녁, 잘 받은 成績表라도 보여드렸을 때면

 시골서 자란 아이가 읍내에 가서 이렇게 공부를 잘 하는 똑똑한 아이라는 稱讚을 어머님께 하시는 것을

 저는 꿈결인 듯 듣고는 했습니다.

 여고시절 당신의 저에 대한 기대는 변함이 없었지만 늦은 思春期에

접어든 저는 열심히 공부하는 學生이 아니었고

결국 당신의 꿈인 女敎師가 되는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지만,

당신은 다시 한번 도전해보라는 말씀은 하셨지만 저의 성실하지 못한 자세에 대한 나무람은 없으셨습니다.

 이후 저의 꿈인 당신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자 고향집에 머물며 晝耕夜讀하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세월동안 당신은 저의 삶을 이끌어 가는 스승이셨고 저는 당신을 닮아 가고자 노력하는 弟子였습니다.

그러나 孔子가 말하는 君子같은 삶을 살아가는 당신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저는 結婚하게 되었습니다.

 始祖母님과 始父母님등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시작하게 되는 딸의 생활이 무척 걱정이 되셨던지

 저의 始祖母님과의 첫 만남에서

당신의 아홉 자식 중 가장 훌륭한 아이가 祖母님의 孫婦가되었다고 말씀을 하셨다지요.

당신의 훌륭한 人品을 익히 알고 계시던 시댁 어른들께서는 당신의 그 말씀 한마디로

저를 곱게 봐 주시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가문의 최고의 며느리로 인정하여 사랑하여 주고 계신답니다.

꼭 제가 당신의 아홉 자식 중 가장 훌륭한 자식이었겠습니까?

아버지로서 내 자식의 삶을 조금이라도 편히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라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아버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저도 결혼초에는

애틋하던 당신에 대한 마음이 이십년이 흐른 지금 날마다 해마다 멀어져 병석에 누워 계신 당신을

시댁 어른들을 핑계삼아 자주 찾아 뵙지 않는 그런 마음이 되었고

결국은 臨終도 지켜드리지 못하는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임종하시기 보름 전쯤 당신을 뵈었을 때 자식들 힘들게 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시다면서

 말기 암 患者의 고통을 안으로 삮이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몸이 약해지면 意志도 약해질 만도 한데 당신의 자식 위한 마음은 가이 없었습니다.

 臨終時 당신의 寤寐不忘 걱정의 대상이었던 어머님과 막내가 지켜보는 데도

 사방을 두리번거리시던 것은 나머지 여덟 자식들을 찾고 계셨으리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버님!

 이승에서 아흔 연세에도 자식들의 행복을 위해 몸과 마음 불태우시던 그 짐 벗어 놓으시고

이제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

아버님께서 그렇게 걱정하시던 葬禮式과 어머님의 거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葬禮式 때 아버님의 四兄弟 아들들이 屈巾祭服하여 상주 노릇 하는 모습은 근래에 보기 드문 모습이었고,

 아버님을 알고 계시는 모든 일가 친척 분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다녀가셨고

그분들은 한결같이 아버님의 人格을 칭송하였습니다.

그리고 各界各層에서 일하는 친구 동료들이 몰려와 弔問客들이 천여명에 달해

 저희 兄弟姉妹들은 弔花 터널을 뛰어 다니며 弔問客 접대하느라 흐르는 눈물도 감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은 大邱에 계시는 큰 오라버님이 모셔 가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67년을 살아오시던 고향집을 두고 생소한 都市生活을 원하지 않으셨지만

 유달리 琴瑟이 좋은 夫婦였던 당신들이였기에

홀로 남은 어머님께서 아버님의 빈자리를 도저히 감당하실 것 같지 않아 저희들이 억지로 大邱로 모셨습니다.

아버님의 敎育과 사랑을 받고 살아온 오라버님인지라 별 무리 없이 새로운 家族形態를 소화해 내시리라

아버님께서도 믿으신다면 이제 걱정은 그만 하셔도 될 것입니다.

 

 아버님!

 칭찬을 하거나 꾸중을 하실 때 직접하지 않으시고

 저희들이 잠든 뒤에 마음속으로 기도하시며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으시던 그 손길도 다시는 느끼지 못하고

初聲 좋은 다정한 목소리로 읊어 주시던 漢詩나 孔子,孟子의 말씀을 전해 주시던 따스한 音聲을

다시는 들을 수 없구나 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항상 공부하시며 군자의 삶을 살고자 하시던 당신의 모습을 간직하게 해준

아버님을 두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마냥 행복해집니다.

 

 아버님!

 당신의 염을 할 때 저희 아홉 男妹의 제일 맏이인 큰 언니께서

“아부지 저승에서도 이승처럼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시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우리 男妹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다시 뵐 수 있는 그날까지 예전 모습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편히 쉬십시오.

                 2000년  9월  14일

      

                         女 息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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