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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퇴계와 밤 퇴계

렌즈로 보는 세상 2008. 10. 18. 21:03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물가 모래밭에는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었으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라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퇴계 이황의 후손들과 유학자들은 퇴계 선생의 제례를 지내고 나면 충북 단양의 강선대에 있는 두향의 묘를 참배한다.
또한 매년 5월 5일이면 단양의 향토사학자와 문인들도 두향제를 지내고 있다.

이처럼 퇴계 학통의 후학들과 향토 사학자들의 추모를 받는 두향은 단양 기생이다. '

퇴계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퇴계를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처럼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인 퇴계 이황 선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조선을 엄격한 유교 국가로 이끈 학자라고 알고 있으나,

밤퇴계와 낮퇴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정감이 있는 인물이었다.

과부가 된 며느리를 개가시켜 줄 정도로 도량이 넓었다.

즉 퇴계는 인간의 본성을 존중했으며, 그의 이기이원론의 근본적 사상도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는 1548년 단양군수로 부임한 한 달만에 둘째 아들 채를 잃어 비탄에 잠겨 있었다.

당시 마흔 여덟 살이었던 퇴계는 그 때 이미 홀로 지내고 있었다.

첫째 부인 허씨를 산후풍으로 잃고 난 뒤 맞이한 둘째 부인 권씨 마저 두 해 전에 사별한 상태였다.

그즈음 퇴계의 일기에는 두향의 이야기가 언급되어있다.

제자인 유학자 김성일이 공무를 보는 틈틈이 책을 읽고 들판을 거닐 때 마치 신선같았다고 했던 퇴계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야금과 노래에 능했던 관기 두향을 데리고 옥순봉을 유람하기도 했다.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가 아내와 사별한 지 2년,

아들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생 두향을 가까이 했기에 밤퇴계와 낮퇴계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단양 시절은 열 달만에 끝나고 만다.

고을 수령은 임기가 보통 5년인데, 그의 넷째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 까닭이었다.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하여 퇴계는 고개 너머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된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급작스런 이별은 두향에겐 큰 충격이었다.

퇴계 역시 헤어짐을 아쉬워하여 단양의 풍경을 소재로 가장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두향은 퇴계를 그리워하다 스물 여섯의 짧은 생을 살다갔다.

 그녀의 유언으로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한다.

그 후 이광려가 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시로 남긴 것이다.

죽기 전 '저기 매화 나무에 물 주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퇴계는 소박하고 거친 음식, 절제된 생활과 학문 탐구로 일생을 보냈지만,

이처럼 두향과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도 남겨 놓았으니 진정한 선비라고 하겠다.

그래서일까. 퇴계를 숭배하는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복숭아 연적을 애장했는데,

복숭아는 다산과 장수를의미하는 귀물이기도 했지만, 그 향태가 여성의 성기를 꼭 닮았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복숭아 연적을 어루만지던 선비들의 모습에서 엄격하기만 했던,

유교문화가 보다 은근해지고 인간적인 면모로 탈바꿈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수화의 대가인 정선은 <박연폭포>와 같은 그림에서 물이 고인 소(沼)는 여성을 폭포를 떠 받치는 바위는 남근을 연상케 했고,

남녀의 성기를 염두에 두고 '음양산수도'와 같은 작품까지 그려냈다.

결론적으로 '퇴계를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다시 생각날 정도로 퇴계의 그릇은 크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음양의 조화를 우주의 근본으로 파악했던 퇴계의 사상과 일화를 통해 우리는 보다 솔직하고 담대한 삶이 올바른 것임을 깨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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