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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년 만에 나온 원이 엄마의 사랑 편지

렌즈로 보는 세상 2008. 8. 19. 16:56

412년 만에 나온 원이 엄마의 사랑 편지

육척 장신의 건장한 체격에 턱수염이 단정한 준수한 얼굴을 가진 젊은이는 입을 꽉 다문 채로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그에게는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들이 있었고 아내의 뱃속에는 또 하나의 아기가 들어 있었다. 건장하던 젊은이는 갑자기 병이 들었고 얼마를 병석에 누어 있었던 듯 하다. 아내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늘 천지신명께 기도하고 자기의 머리를 잘라 신을 삼았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젊고 예쁜 아내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들 부부는 그 일대에서도 소문날 만큼 금슬이 좋았고 집안도 넉넉하여 인근의 부러움을 독차지했을 법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은 이제 그녀에게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졌다. 아내는 함께 따라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귀여운 자식이 있고 또 뱃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씨가 자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 대신에 그가 남겨놓은 자식들을 보며 마음을 새롭게 다져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제 남편이 관속에 들어가고 이 집을 떠나면 영원히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아껴하던 물건들과 평소 입던 철릭(저고리와 짧은 주름치마가 아래위로 붙은 조선 중엽의 남자옷)이며 직령 단령 등 옷가지를 정성스레 챙겨 저승으로 갈 남편에게 입히고 또 여벌의 옷도 싸 놓았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옷 중에서 남편이 특별히 예쁘게 보던 꽃무늬 비단 저고리와 치마 또 나들이할 때 머리를 가리던 명주 장옷도 차곡차곡 접었다.

장문을 닫으려다 아내의 눈에 남편이 애지중지 귀여워하던 아기 저고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도 꺼내 함께 챙겨서 자기 옷과 함께 관속에 누운 남편 가슴 위에 얹었다. 이제 그는 저승에 가도 혼자가 아닐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기를 가슴에 안고 함께 길을 떠나니 그는 세상을 달리 했어도 외롭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내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마음에 정신을 가다듬기 힘들었다. 이 안동 고을에서 그래도 누구누구 집 하면 모르는 이 없는 훌륭한 문중 며느리로 들어와 겉으로라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은 종이 한 장을 펴놓고 먹을 갈았다. 평소 남편이 쓰던 붓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붓을 잡고 보니 이 집에 시집와서 남편 사랑 받으며 지냈던 시간들이 두루말이처럼 펼쳐지고 한 이불 속에 누워 속삭이던 말들 한 마디 한 마디가 귓전에 살아 맴돌았다. 그러면서 다시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을 생각하니 슬픔이 복받쳐 올라왔다. 아내는 천천히 붓을 움직여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원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쓰고는 종이를 뒤집었다. 저승으로 가는 남편에게 직접 들려 갈 것이니 봉투를 따로 마련할 것도 없었다. 오늘이 유월 초하룻날었다. 맨 첫줄에 조금 내려서 날짜를 적었다.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다시 어림으로 두줄 가량을 띄우고 본문을 쓰기 시작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쓰고 나니 종이가 모자랐다. 그녀는 종이를 옆으로 돌렸다. 종이의 머리 부분에 지금까지 쓴 글과는 서로 직각으로 엇갈리게 줄을 잡아 다시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다시 종이가 모자라 마지막 구절은 다시 종이를 돌려서 결국은 글이 시작한 첫머리로 돌아와서 첫째 줄과 날짜를 적은 줄 사이에 거꾸로 써 내리고 끝을 맺었다.

젊디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이 젊은이에게는 아내와 자식 말고도 부모는 물론 아직 젊은 형도 있었고 손 윗누이들도 있었다. 자식 잃고 형제 잃은 그들의 슬픔은 아내와는 또 다른 정한이 가슴을 때렸을 것이다. 젊은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마는 남달리 우애가 깊었던 형 또한 하나 뿐인 동생을 잃은 슬픔을 누를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자식이 타향에서 공부할 때 자주 편지를 보냈고 자식 또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답장에 실어 보내곤 했다. 아버지는 벽에 걸린 편지꽂이에 언제나 끼워두고 바라보고 하던 편지들을 차곡차곡 접어 자식이 평소 차고 다니던 비단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는 출타할 때에 가지고 다니던 참빗 하나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청상 제수의 흐느끼는 뒷모습을 보면서 형도 방으로 들어가 평소 아끼던 접부채 하나를 펴들었다. 대나무 살이 종이보다 더 얇게 갈라져 붙은 매끈한 손잡이의 접부채는 아무런 글씨나 그림도 그려있지 않은 흰 부채 그대로였다. 형은 책상 머리에 얹힌 벼루에 조금 남은 먹물을 보고 붓을 적셔 흰 부채면에 네 자씩 네 줄의 시를 지어 정성스레 글을 썼다.

    너의 마음은 대쪽같이 곧았고

    깨끗하기가 흰 종이 같았다.

    내가 늘 손에 지니던 이 부채를

    다시 못올 길을 떠나는 네게 보낸다.

    형이 곡을 하며

글을 쓰고 난 후 먹물이 마르길 기다리며 다시 한번 시를 읽으니 이제 다시는 못 볼 동생에게 주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물건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이 차질 않은 것이다. 서가 위를 쳐다보니 동생과 함께 시를 지으며 쓰다 만 종이 뭉치들이 보였다. 그는 다시 종이를 내려 동생을 떠나보내는 애틋한 마음을 다섯자 시로 적어 슬픔을 달래기 시작했다. 동생을 마지막 보내는 만시(輓詩)였다.


    너와 함께 어버이를 모신지가
    이제 서른 한 해가 되었구나
    이렇게 갑자기 네가 세상을 떠나다니
    어찌 이리 급하게 간단 말인가
    땅을 치니 그저 망망하기만 하고
    하늘에 호소해도 대답이 없다
    외롭게 나만 홀로 남겨두고
    너는 저 세상으로 가서 누구와 벗할는지
    네가 남기고 간 어린 자식은
    내가 살아 있으니 보살필 수 있겠지
    내 바라는 것은 어서 하늘로 오르는 것
    전생 현생 후생의 삼생은 어찌 빠르지 않겠는가
    또한 내 바라는 것은 부모님이 만수하시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라네
    형이 정신없이 곡하며 쓴다.


형은 붓을 내려놓고 먹이 마르길 기다려 종이를 곱게 접어 제수가 쓴 글과 함께 동생의 넓은 가슴 위에 얹어 놓았다.

관 뚜껑이 닫히고 이제 아주 떠나보내기에는 너무나 젊고 수려한 얼굴의 남자는 사랑하는 아내와 하나뿐인 자식과 형 그리고 이제는 예순 셋의 늙은 아버지와 또 울다 지쳐 몸도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를 두고 앞소리꾼의 구슬픈 만가 소리만 허공 중에 남겨놓은 채 마을 뒷산 중턱에 묻혔다. 무덤에 오르면 북으로 산등을 넘어 낙동강 물소리가 들리고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놀던 귀래정 앞 솔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덤의 바로 앞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건너면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누워 계신 산소가 마주 보였다. 할아버지는 그가 열살 되던 해에 환갑을 지낸 다음해에 돌아가셨다. 그가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미이라에 가까운 시신 출토

그가 그렇게 아까운 나이에 죽은 후 사년이 지나 임진왜란 칠년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은 안동이라고 그냥 두지는 않았다. 안동에서는 세도께나 부렸던 그의 집안이었지만 그 힘든 전쟁기간에 무사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과 늙은 부모를 모신 그의 젊은 아내가 당했을 고초야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좀 넘어 그의 아버지는 여든 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형도 또한 아흔 두 살까지 살다가 죽었다. 그들은 아직은 청년이라 할 나이에 세상을 등진 그의 몫까지 살았는지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한 셈이었다. 그의 젊은 아내는 언제 죽었을까?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의 이름은 이응태(李應台)이고 관향은 고성(固城)이다. 아버지 이름은 요신(堯臣)이고 그와 각별히 지냈던 하나 뿐인 형은 이름을 몽태(夢台)라고 했다.

그의 집안이 이곳 정상동에 자리잡은 것은 그의 오대조인 이증(李增)에 의해서다. 증은 1419년(세종 원년)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진해와 영산의 현감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관직에 나가 행정 일을 보는 것에 그리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영산 현감을 지내다가 중도에 안동으로 내려와 남문 밖 운흥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것이 고성 이씨 집안이 안동에 자리잡은 시작이 되었다.

그의 아들 굉( )은 아버지와는 달리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수많은 관직을 두루 거치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해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다시 풀려난 뒤 한성좌윤 개성유수 등을 거친 후 1513년(중종 8년) 안동으로 내려와서 안동부성에서 낙동강을 건너 마주 보이는 강가 언덕에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만년을 지내다가 1516년 일흔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금 안동댐으로 오르는 초입에 있는 임청각이란 큰집은 그의 동생으로 개성유수를 지낸 명( )에 의해 건립된 집이며 한말에 계몽운동과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을 하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명의 17대손이기도 하다. 안동에서의 고성 이씨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98년 4월 귀래정 서쪽의 야산들이 중장비에 의해 밀려나가고 있었다. 안동시가 강 건너 남쪽으로 뻗어나기 위해서 이곳에 대규모 택지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소나무와 갖가지 잡목들이 울창하게g 우거져 발을 들여놓기 힘들던 산들은 이제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고 골짜기와 능선은 하나가 되어 평지로 바뀌었다. 정상동에 처음 들어온 이굉과 그의 자손들이 잠자고 있던 산등성이들이 하나씩 무너지면서 그들의 유택들도 모두 이 땅을 떠나야 했다. 4월 6일 이굉의 묘를 필두로 해서 이 땅의 주인들이 차례로 오백 년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7일에는 이굉의 손자인 명정(命貞) 묘의 이장 작업을 시작했다. 묘에는 명정과 그의 부인인 일선 문씨(一善文氏)가 합장되어 있었다.

이중 일선 문씨의 관에서 거의 미이라에 가까운 상태의 시신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관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할머니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고 50여점에 이르는 의복과 장신구 등의 유물이 당시 모습 그대로 출토되었다. 이 일선 문씨의 미이라 소식은 텔레비전 뉴스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안동에서도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또다른 분묘의 이장작업

그리고 보름이 좀 넘게 지난 4월 24일 명정의 묘에서 북쪽으로 마주 보이는 작은 등성이 중턱에 주인이 확실치 않은 분묘 하나의 이장작업이 있었다. 이 분묘는 봉분이 내려앉아 겨우 흔적만 보였는데 봉분 위로 백년은 넘었음직한 소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떡갈나무 등 잡목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이 무덤은 박물관에서 발굴대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1997년 11월 초순 이 무덤이 파헤쳐 졌고 그 안에서 철성 이씨라고 쓰여진 명정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안동의 어느 문중에서 이 무덤을 자기들의 잃어버린 조상묘로 짐작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회곽과 외관을 파손한 것이다. 현장은 무참히 파헤쳐졌다가 다시 메워졌는데 내관까지 드러났었기 때문에 파손이 상당히 심했으리라고 추측되었다.

그러나 정식 발굴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사를 할 수 없었으며 또한 고성 이씨 집안에서는 자신들의 조상 분묘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다른 묘들과 함께 문중에서 이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 후 이 묘는 학술적인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시간은 그럭저럭 여섯달이나 흘러버렸다. 그리고 이제 묘주가 확실한 분묘들의 이장작업이 마무리 된 후 고성 이씨 문중에서는 마지막 하나 남은 이 분묘의 이장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명정의 부인인 일선 문씨 관이 드러난 후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 직후여서 문중에서는 다시 이 묘의 출토작업을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였다. 토광의 내부를 파내니 작년에 분묘를 팠던 사람들이 덮어놓은 푸른 천막천이 드러났다. 천막천을 베껴내니 그 안에서는 아직도 새것같은 소나무 외관이 모습을 나타냈다. 외관의 뚜껑은 그냥 열렸다. 내관은 아직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우리는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일단 관을 귀래정 앞으로 옮겨갔다. 다시 작업을 시작한 것은 여덟 시가 거의 되어서였다. 전기를 끌어다 등을 밝히고 사다리를 세워 촬영대를 만들고 자동차 전조등을 작업장으로 켜서 작업을 쉽게 하도록 하였다. 대렴이 하나씩 벗겨지고 평상시 입던 옷들을 시신의 위에서 걷어낸 후 입혀졌던 옷들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겉옷이 벗겨지고 속바지도 벗겨냈다. 손목의 토시가 나오고 발에서 버선이 벗겨졌다.

신장은 176센티였는데 살아 있을 때는 아마도 180은 훨씬 넘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신은 많이 부패되어 있었으나 얼굴의 모습은 그런대로 알아볼 만 했다. 턱에는 짧은 수염이 나 있었고 매우 준수해 보였다. 그러나 가슴과 복부의 내부는 텅비어 있었고 살은 진흙덩이처럼 부스러져 있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선선해지면서 가늘게 빗방울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일이 급하게 되었다. 여기서 비가 쏟아지면 꺼내놓은 유물은 물론이고 시신의 정상적인 수습도 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빠른 작업을 위해서 장의사를 불렀다. 유골을 유골대로 살은 살대로 수습되어 각각 제자리를 찾아 원상에 가깝도록 하고 새로 사온 수의로 염습을 하여 새 관속에 모셔졌다.

유물은 글씨가 쓰여진 문서들을 비롯하여 복식자료 등 50여점이 수습되었다. 새벽 1시가 넘어 작업이 끝났다. 작업이 끝날 무렵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도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중에서는 이를 앞에 말한 이명정의 손자 중 둘째인 응태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장 작업을 할 때에는 지금은 의성에 사는 응태의 후손들이 여러명 찾아와 지켜보기도 했다. 응태의 무덤은 족보상에 이미 잃어버린 것으로 나와 있으며 또 다른 무덤들은 모두 확인이 되고 있었고 이장 작업도 다 끝난 뒤였다.

응태 부인의 언문편지

박물관 정리실은 두기의 무덤에서 수습된 유물들로 꽉차게 되었고 유물 하나하나를 세척하고 정리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유물을 정리해가면서 우리는 점점 미이라 사건으로 유명해진 일선 문씨 무덤보다 그의 손자인 이응태의 무덤에 더 관심이 가게 되었다. 그러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킨 계기가 된 것은 응태의 부인이 관에 넣어둔 언문 편지였다. 앞에서 읽어본 것처럼 편지의 내용은 구구절절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를 잃은 슬픔 그리고 자식들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착잡한 심경이 얽혀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거기에 형 몽태가 죽은 동생을 위해 쓴 만시 또한 끈끈한 형제애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장의 종이에 뭉쳐진 머리카락 다발같은 것이 눈길을 끌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벗겨내니 그것은 삼줄기와 머리카락을 섞어 삼은 신발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쌌던 흰 종이에는 한글로 적힌 글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글자는 읽을 수 없게 되었으나 그 가운데는 '이신 신어보지도'라는 글귀가 확인되었다. 그것은 물론 이신을 신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내용으로 그의 아내가 쓴 글이었다. 아내는 병든 남편이 하루 빨리 회복되도록 자신의 머리를 잘라 정성스레 신을 삼아 놓고 천지신명에 기도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한 켤레의 신은 앞서의 편지글과 함께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머니 속에서는 대추나무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작은 참빗 하나와 함께 열 한 통의 편지가 봉투에 든 그대로 나왔다. 봉투에는 '아버지 편지에 대한 응태의 답장'이라는 뜻의 글자들이 써 있었다. 이로써 이 묘의 주인이 응태임이 확실해진 것이다.

사백년 계속된 응태부부의 사랑

그가 세상을 뜬 것이 1586년 5월이고 묘가 발굴되고 유물과 함께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 1998년 5월이니 꼭 사백 열 두 해 만에 그들 부부의 지극한 사랑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지금 먼저 떠난 남편을 그토록 그리며 안타까운 정을 긴 문장에 담아 관 속에 넣어 함께 보내준 그의 사랑하던 아내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알 수만 있다면 다시 부부를 함께 묻어주고 싶었다.

사백여년 뒤의 후손들과 얼굴을 마주한 뒤 그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안동시 풍천면 구담에 유택을 옮겼다. 무덤마져 잊혀졌으니 명절 때 성묘 오는 이도 물론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완전히 잊혀진 남자였다. 이제 몇 백년이 지나 정말 기적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리고 아내와의 애타는 사랑 이야기까지 사람들에게 가지고 나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제 그는 더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금년 추석부터는 그의 묘 앞에도 제물이 차려지고 또 처음 보는 후손이긴 하지만 그에게 큰절을 올릴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옆에 없지만 그러나 하늘에서 그들 부부는 여전히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믿는다. 그들 부부의 사백년의 사랑은 앞으로 오백년도 천년도 아니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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