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안주인이 들려주는 고택 살이

좁쌀 반 말로 시작한 고택살이

렌즈로 보는 세상 2008. 11. 24. 19:58

안주인이 들려주는 고택 살이

                              - 두 번째 이야기

 

   치암고택은 내가 체험지도자 일을 하기 이전에도 두어 번 들렸었고 체험지도자 일을 하면서도 손님을 모시고 몇 번,

2차 고택나들이 행사 차 몇 번을 들려봤지만 그 댁 안주인은 언제나 중년의 아주머니였다.

 

그래서 2차 고택나들이 행사 답사 차 들렸을 때

내가 생각한 안주인께 이댁에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주십사고 말씀드리니

당신은 치암고택이 여기로 이사 온 후에 시집을 왔기 때문에

그 후의 일이나 알지 원촌에서 살던 이야기는 잘 모른다고 하시며

몸이 불편하셔서 방안에 계시긴 하지만 당신의 시어머니가 계시니

상공회의소 회장을 하시는 큰아드님(이동수)의 도움을 받으면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원촌에서 살던 이야기까지 들려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신다니 너무나 반가워 큰아드님과 시간약속을 하고

지난 주말 치암고택을 찾았다.

 

 

치암고택을 들어가는 골목길은 2차 고택나들이 때만해도 노랗게 뒹굴던 낙엽의 색깔은 더욱 짙어져 흩날리고,

골목초입의 향산고택 돌담의 담쟁이 단풍잎은 이제 줄기마다 마지막 한 잎으로 떨고 있었다.

 

치암고택의 대문을 들어 설 때마다

정갈하게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 이곳을 양식 숙박시설의 등급으로 한옥을 평가한다면

호텔급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었는데 그 느낌은 여전하였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큰아드님이 반겨주시며 다시 한 번 글을 쓰는 취지에 대해 물으셨다.

 취지를 말씀드리니 그럼 내가 거들어 줄 테니 어매한테 직접 들으라시며 안채로 안내하신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지나 안뜰로 들어서니 티끌한 점 없이 깔끔한 안마루의 느낌이 안주인의 성품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안마루를 거쳐 할머니 방으로 들어서니

오랜 세월 바깥출입을 못하시는 병환중의 노인이 거처하시는 방답지 않게 깨끗하게 정리된 방과

깔끔한 할머니의 모습이 자식들의 효심이 두드러져 보이게 하였다.

 

 

인사를 드린 후 아드님이 귀에 데고 어매 살아온 이야기 들으러 왔다고 말씀드리니

불편하신 중에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우시며 “아이구 무세라 내 살아온 것은 말로 다 못해” 하시며

고택의 늙으신 안주인 권수양(88세)할머니는 살아오신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좁쌀 반 말로 시작한 고택살이

                                                                        권 수 양 구술

 

 

귀가 조금 어두운 할머니를 위해 통역을 하시는 아드님

 

나는 영해 나라골 지족당(장수공 권만두) 고택에서 

 한학자인 아부지와 성품이 고운 어매사이의 아들 둘 딸 둘 중 맏딸로 태어났어.

그때만 해도 친정이 잘 살아서 어려운 것 모르고 자라 바느질이나 손님접대 하는 것을 배우며 시집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19살 때 외가에서 중매해서 18살 난 신랑( 이원봉 87)한테 선도 안보고 시집왔어.

 

우리외가는 진성이씨 인데 외할매 친정이 법흥 고성이씨라 외할배가 처가살이로 법흥에 살았어.

외가에서는 나를 중매했으나 시집이 그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는데

내가 시집오니 때 꺼리가 없다는 소식 듣고 어른들이 중매 잘못했다 싶어 마음고생이 심했제.

외가집은 나중에 봉화로 이사 가서 살다가 또 만주로 갔어. 멀리가 살았으니 그 후로 소식은 잘 모르고 살았어.

 

내 중매는 외할배가 우리 아뱀(시아버지)하고 둘이 우리 사돈하자고 해서

친정 아부지한테 중매말을 넣으니 아부지는 도산서원 원장을 할 정도로 학식이 있고 훌륭했지만 안동양반들을 좋아했어.

 특히 퇴계선생 가문인 진성이씨를 좋아해서 중매말이 들어오니까 양반 좋다고 허락했어.

그때는 양반만 봤제. 재산이 많은동 신랑인물이 어떤동 그런 것은 안봤거덩.

 

   

 

 

시집을 봄에 왔는데 나라골(영덕 창수면 인량리) 집에서 가마타고 영해까지 가서

영해서 차타고 안 동예안까지 와서 예안에서 원촌(도산면 원촌리) 시집까지는 또 가마타고 오니 해가 저물었어.

 

신행을 오니 시집에는 큰 어맴(시조모), 아뱀(시 아버지), 어맴(시어머니), 신랑 이렇게 살고 있었 어.

와보니 봉화 선돌(강참판댁) 사시는 춘양 시고모와 영주 줄포(안협댁) 사시는 줄포 시고모가

아주 잘 살아서 친정 잔치에 오면서 가지고 온 쌀을  먹고나니 식량은 좁쌀 반 말 뿐이래.

그래 그걸 가지고 조당수(나물 섞어) 끓여 먹었제.

그걸 끓여먹으며 길쌈하고 밭에 씨 뿌려 여름에는 보리농사 지은 것으로 보리쌀에 감자 섞어 해먹고

겨울에는 가을 농사지은 좁쌀을 가지고 조밥 해 먹었어. 배가 얼매나 고픈 동 만날 허기졌어.

 

원래 시댁은 그렇게 가난하진 않았다 그래.

그런대 큰아뱀(시조부)이 안동서 사업을 하다가 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가지고

집안이 쫄딱 망해서 그렇게 가난해졌다 그래.

 

 

시집와서 보이 시집이 양반은 양반이래.

 시고모님들도 모두 양반집으로 시집갔고 시외가는 봉화 오록 망와 종가고 시조모 친정은 봉화 해저고

혼맥도 그렇지 마는 없어도 제사는 어느 때고 정성들여 차리더라꼬.

집에 돈이 없어 제물을 못살 형편이면 아뱀이 잘사는 동생들이 사는

영주 줄포로 봉화 선돌로 다니시면서 제물을 얻어 와서 제사를 지냈어.

 어려워도 탕은 꼭 5탕(우(날개 달린 것), 모(털 달린 것), 인(비늘 달린 것), 개(조개류), 갑(뚜껑있는 것.대게))을 썼어.

어떤 때는 시고모님댁에서 얻어온 쌀에 미가 반은 섞여있어 그걸 하루 종일 골라서 매밥을 지었제.

보통 때 조밥이나 보리밥만 먹다가 제삿날에 이밥을 먹으면 씹을 틈도 없이 넘어갔어.

 

내가 시집왔을 때 원촌은 한 서른 집 정도가 모두 산 밑으로 죽 돌아가면서 있었고

우리 집은 지금의 원촌 육사문 학관 바로 앞에 있었어.

그런데 원촌은 물가인데 도 논이 별로 없어서 동네 처자들이 시집 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시집간다고 했제.

 

 

권수양 할머니 

시집와서 2년 있다가 신랑이 보국대 끌려갔어

넉넉잖은 살림에 일할 사람은 없으니 그때 참 고생 많이 했제. 남의 바아(디딜방아) 찧어주고 식량 얻어 오고,

 빨래 빨아주고 얻어오고, 남의 명(목화)을 큰어맴은 잣고 나는 베를짜고 해서 식량을 얻어먹고 그랬어.

 

우리 어맴은 살림을 규모있게 하지 못해서

아뱀이 뒤주에서 식량을 내 줄 정도였으니 품파는 일도 못했고

아뱀은 그때만 해도 뼈대 있는 집 어른이라 남의 일하러 가시지 않았어.

살림은 어른들이 들고 하시고 나는 일만 했제.

신랑이 보국대 가고 없으이 내가 힘든다꼬 그때 큰어맴은 서울 적은집에서 모시고 갔어. 그래서 조금 수월했제.

 

 신랑이 보국대 갔다 오고 나서 우리 둘이 열심히 일만 했제.

그땐 아를 일찍 안낳은 게 얼마나 대행인지 몰래.

아아가 없으니 일을 더 마이 할 수 있었제.

신랑이 착하고 부지런해서 집주변을 일궈 밭을 만들고 밭을 논으로 뜨고,

소와 닭을 키워 팔고 해서 점점 살림이 좋아졌어.

 

 

내가 시집왔을 때도 우리 집은 일 해주는 아랫사람 내외가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 해방이 되니까 외지로 나가고

그 집은 뜯어 나무하고 집터는 밭을 만들고 집에서 나온 돌은 우리 집 담을 만드는데 썼어.

 

 

시집와서 5~6년 있다가 시어른 두 분이 한해에 돌아가시고 나니 3년 상 치르고,

큰어맴은 한 오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셔서 또 3년 상을 치뤘어. 옛날에 삼년상을 치루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제.

어디 요새 같이 물자가 풍부하나? 그런데 손님은 하루가 멀다고 문상 왔으이께.

그리고 장사(장례식) 때도 손님이 많았지만 3년 탈상 때도 손님이 엄청시리 많았제. 그때는 먹을 게 없던 세월이라 문상을 오면 며칠 씩 묶으며 먹고 갔으니 얻어 먹으로 오는 사람도 많았어.

 

 

시조모님 돌아가실 때쯤 야아(이동수)를 낳았제.

 10년만에 얻은 자식이라 얼매나 이뿐 동 정신없이 키웠제.

시집와서 5년 있다가 낳은 아들을 없앴으니 그 아들이 어땠을 노? . . .

나는 아아들이 뜨문뜨문 들어서서 그 다음에도 5년~6년 터울로 아들 셋을 더 낳았제.

야들 키울 때 겨울에 양말이 어데 잘 있나.

바아(디딜방아) 찧을라 카먼 아 업고 해야 하는데 업으면 발이 쑥 빠져나와.

발 얼까봐 어른 양말에 소개(솜)넣어 끈으로 발목 묶어 신겨서 일했제. 그때 겨울은 어째 그케 추웠는동.

 그런데 우리 아아들은 크면서 싸우는 법이 없어.

나이 터울이 많이 나서 그런지 모르지만 형이 동생 업어 키우고, 만날 저 형제끼리 어울려 놀고 그랬어.

 

 

야아들 학교 시킬 때 우리 내외는 정신없이 일만했제.

촌에서 월사금 낼려고 하면 예안장에 마늘이나 곡식을 이고 지고 가 팔아 돈 만들었어.

그 때 예안장을 가자면 낙동강을 따라 도산서원 밑을 지나고 농암종가가 있던 분천 마실을 지나서 걸어 갔제.

예안장은 지금의 예안 서부동 밑에 있었어. 머리에 이고 장에 갔다 오면 장베기가 턱신턱신 했어.

그렇게 바쁘게 살다보니 며느리 보기 전에는 친정을 빨리 간 것이 9년 만에 갔고 젤 오랜만에 간 것이 13년 만에 갔어.

어려울 때 친정에 가서 식량도 얻어오고 싶었지만 바쁘고 어른 들 눈치 보느라 못 갔어.

 

 

이 집은 내가 시집 왔을 때도 똑 같이 원촌에 있었어.

1976년에 댐이 들어서 마을이 수몰되어 보상 받아서 여기로 옮겨지었어.

75년에 보상 받아서 안동시내 명륜동에 집을 세 얻어 1년간 살면서 집을 지었어.

나라에서 지어주니 내가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어.

원촌을 떠나올 때 도시로 오는 것은 좋았는데

시집와서 사십년 가까이 살던 고향과 우리 내외가 피땀 흘려 장만한 3000평쯤 되는 농토를 버리고 오는 것은

얼매나 섭섭든동. 그 때 마음고생 마이 했제.

 

 

 

야아가 대구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바로 한전에 취직돼서 월급타면서 내가 살기 수월해졌어.

야 월급으로 동생들 학교 시키고 했으이께네. 지가 동생들 학교 시키느라 고생 마이 했제.

 

우리 큰 며느리는 인동 장씨(여현 장현광) 종가 종녀로, 77년에 중매로 우리 아들과 선봐서 결혼했어.

며느리 볼 때 내 시집왔을 때 때 꺼리 없었던 생각이 나서 바깥주인이 쌀을 두가마이 받아 가주고 독에 가득 채워 놓았어.

우리는 잘한다꼬 해놨는데 며느리가

“아버님 쌀을 너무 많이 받아놔서 우리가 갖다 먹자면 힘이 들겠네요“ 라고 해서

우리가 옛날 생각만 했다는 것을 알았제.

 

 

여어 이사 와서는 어려운 일은 별로 없었어. 야아가 벌어주는 돈으로 놀면서 먹고 살았으이께네.

큰일은 우리 내외 환갑 한 것이 젤 큰일이었제.

나는 생일이 섣달 그믐날이고 사랑양반은 삼월 삼진 날이라 내 생일을 미뤄서 영감 생신날에 맞춰서 했어.

그 때는 사느라고 바빠서 손님 접대를 제대로 못한 것을 마음껏 했제.

사가 어른들과 조금이라도 연비가 있는 사람은 모두 청해서 잔치를 했제.

우리 내외는 더없이 즐거웠지만 돈대고 일하는 야들 내외가 애먹었제.

 

내가 80살 먹었을 때 쓰러져서 병원에 가이께네 가망 없다고 집으로 돌아가라 케서 집에서 장사 치른다고 돌아왔는데.

우리 며느리가 얼매나 간호를 잘했든 동 내가 다시 살아나서 온데 다니기도 했는데 다시 쓰러져서 이렇게 됐어.

빨리 일어나든동 죽든동 해야 아아들이 수월할껜데.

 

치암고택에서 열린 음악회

 

 노인들은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물으면 즐거워하시는  것 같다.

 치암고택의 익동댁 권수양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풀어내셨던 이야기는 할머님의 일생이 그 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이 겪었던 힘들기는 하셨지만

불행하지 않았던 삶이었던 것 같았다.

특히 이야기 도중에 한 번도 사랑어른에 대한 불만을 말씀하신 적이 없으신 것을

보면 두 분의 사랑이 깊으셨던 것 같고.

사랑어른께서도 이런 저런 빌미로 우리 방을 기웃거리시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돌아오면서

오늘 치암고택에 간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 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님의 노모와 소통하는 모습과 노부부의 은근한 사랑은

핵가족화 되어가는 요즈음

 대가족제도의 따스하고 푸근함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