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안주인이 들려주는 고택 살이

귀래정 마루에 한 번 쉬어 보지도 못한 귀래정 살이

렌즈로 보는 세상 2008. 12. 12. 19:56

안주인이 들려주는 고택 살이

                                                                             -  세 번째 이야기 -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원고 마감일은 가까워 오는데 아직 이야기를 들려줄 안주인이 결정되지 않았다.

고민고민 하다가, 지난 번 고택나들이를 내앞마을로 갔으니

이런 일에 협조적이신 청계 김진 선생의 셋째 아드님인 운암 김명일 선생 종가 노 종부님께 전화를 드렸으나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사유를 말씀드릴 여유도 없이 아무도 없다며 전화를 끓으신다.

 

다음날 아침 다시 전화를 드리니 할머니의 아드님이신 종손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사연을 말씀드리니 "어매가 편찮으셔서 어제 퇴원 하셨고, 기력과 기억력이 크게 떨어져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고 하신다.

 

작년 늦가을 잠깐 뵈었을 때, 꼬장꼬장한 모습으로 메주를 써서 처마 밑에 가지런히 달아놓고

무말랭이를 썰어 툇마루에 말리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렇게 기력이 떨어지셨다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노인의 건강은 밤새 알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빠른 쾌유를 빌며 이곳저곳 고택에 전화를 드렸으나 부재중이시거나 편찮으셨다.

 

 

할 수 없이 이번 고택나들이 코스 사전답사 차 귀래정에 들려서 안어른께 부탁드렸으나 이야기 꺼리가 없으시다며 손사래를 치신다.

어른은 평소에도 두드러져 보이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시라 퇴짜 맞으리라 생각은 하였지만 역시였다. 

 

원고 마감은 이제 4일 남았으나 주말에는 시댁에 가서 김장을 해야 되겠기에 실재로는 이틀이 남았다.

퇴근을 하고 귀래정 어른께 전화를 드려 다시 부탁을 드렸으나 역시 거절을 하신다.

 

이런저런 말씀으로 설득을 하였지만 절대로 안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기나긴 겨울밤이 심심하실텐데 제가 어른들과 두 시간만 놀고 싶다고 했더니 놀러 오는 것은 막지 않는다고 하셨다.

 부랴부랴 옷을 주워입고 어른들이 좋아하실 것 같은 과자와 사탕, 음료수를 사들고 귀래정 종가를 찾았다.

 

동네 가운데 있는 집이 아니어서 낮에도 조용하지만 밤에 찾아간 귀래정 종가는

대부분의 노인들이 살고 있는 주택이 다 그렇듯이 방 한 칸에만 불이 켜져 있는 것이 적막하기까지 했다.

 

담도 없고 대문도 없는 집으로 들어서니 문은 꼭꼭 잠겨있고 초인종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누르지. 

무조건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니 할머니께서 내복 바람으로 "참말로 왔니껴?" 하시며 문을 열어주신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마루는 난방이 들어오지 않아 썽그런 느낌이 들었으나

어른들이 거쳐하시는 방안은 옛날 군불지핀 방같이 따끈따끈하고 아늑하였다.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가 옛날 어릴 적 귀미에서 사실 때 이야기를 물어보니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하시며

"아이고 안할라 켔는데 별것도 없는 옛날 일을 이래다가 다 할라." 하시며

귀래정 안주인 구일댁(김승기. 75세)은 이야기보따리를 스스로 푸셨다.

 

 

 

 

 

 

 

귀래정 마루에 한 번 쉬어 보지도 못한 귀래정 살이

                                                                                김 승 기 구술

 

귀래정 안주인 구일댁

 

나는 안동 일직 귀미에서 귀와 김굉 선조의 후손으로

밭 노친(아버지) 선자 경자 어른과 안 노친(어머니) 진성이씨 사이의 1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어요.

우리 집은 그리 큰 부자는 아이래도 먹고살 걱정은 없었어요.

우리 아부지는 사형제분 중 둘째였는데 사형제분들이 결혼하고도 한 울안에 살았어요.

큰집은 할매 뫼시고 백부님 식구들이 골기와 집에 사시고 우리 지차 집들은 돌레돌레 돌아가며 한 울안 초가집에 살았어요.

 

 

 

 

클 때 우리 삼남매도 화목했지만 여남은 넘는 종반간(4촌 지간)이 같이 자랐으니 참 재미있게 살았어요.

 큰집에는 제사도 많고 머슴도 둘이나 있는 부자 집이라서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 안 노친이나 숙모님들이 할매도 뵙고 일도 거들어 주러 거의매일 큰집에 들어가면

우리 종반 간에 어울려 재미있게 놀고 그랬어요.

그 때 같이 큰 사촌들이 모두 잘 됐어요. 계몽사 김원대 사장도 있고.

 

큰집이 사파종가라 일 년에 제사를 열 번 넘게 지냈는데, 과실이나 어물도 잘 차렸지만 귀미가 들판이라 특히 편을 잘 차렸어요.

본편(시루떡)과 웃기떡으로 경단, 인절미, 절편, 잡과편, 전, 조약, 깨구리를 안어른들이 정성껏 만들었어요.

이때쯤 제사를 지내면 그 시루떡을 감홍시에 찍어 먹으면 꿀맛이었제요.

 

 

우리 어렸을 적에 놀음이 드셌어요.

여름에는 일하느라 놀 새가 없어 못 놀다가 겨울이 오면 얼매나 놀았든 동 말도 못해요.

 

동네가 거지반 일가친척이라 동네 처자 총각들이 모이면 한 스무 남씩 됐어요.

 무꾸 구데이 파서 훔쳐 먹고, 감자 구데이 파서 훔쳐 삶아 먹고 그랬어요.

 

그래 훔쳐 먹다 들키면 어른들이 " 야 이놈들아 씨도 다 내먹고 어짤라꼬 카노, 예이 고얀 놈들아!" 하고 소리 질렀지만 크게는 야단 못치제.

 니아 네아 할 것 없이 그 때는 노는 게 그랬는데 뭐.

 

요맘때쯤에는 집집마다 노인들 드릴라꼬 감홍시를 짚동 안에 여 놓은 걸 마이 훔쳐 먹었어요.

정월에는 우리 삼파문중 젊은이들이 다 모이면 이삼십 명은 됐거든

윷 놀아서 비빔밥 해먹고 저녁에는 번호 맞추기 해서 떨어진 사람 노래하고 참 재미나게 놀았어요.

 

 

 

크면서 우리는 천역(힘든 일)을 많이 했어요.

어렵던 시절이라 들일도 하고 길쌈도 하고 그 때는 집에 샘이 없어 어렸을 적부터 물동이로 물을 많이 여다 날랐어요.

머리꼬리 길게 따아서 물이러 가다가 낮선 남자들 만나면 뒷걸음쳐서 돌아오던지 담 모퉁이 옆에 숨어 섰다가

그 사람이 지나가면 다시 갔어요.

 

 여름에 들일 거의 끝나면 삼을 삼는데 맨살 무릎에다 데고 하도 비벼서 피가 나고 그랬어요.

여름밤은 짧지, 잠은 얼매나 오든 동. 그나마 마이 더울 때 들일 안가고 감나무 그늘에서 삼 삼는 것은 할 만했어요.

 삼복더위에 밭을 매면 따이 달아서 숨이 턱턱 맥히거든요. 베도 마이 짰지요. 그렇게 힘든 일 하다가 시집와서는 들일은 안했어요.

 

스무 살에 우리 동네에 사는 타성, 광산김씨 할배가 중매해서 선도 안보고 어른들끼리 좋다고 해서 이집으로 시집오게 되었어요.

 옛날에는 미약(약혼. 요즈음 상견례와 비슷함)을 먹었는데,

 신랑(이도형. 78세) 측에서 신부집안 어른들께 한턱내고 서로 인사도 하는 것인데

우리 아뱀이 운산 장에 와서 우리집안 어른들과 중매쟁이한테 한 턱 냈어요.

 

나와 신랑은 가지도 안하고 어른들만 미약 먹고 왔다고 하는데도 얼매나 부끄러운 동 횃대 밑에 숨었다카이께네요.

스물두 살, 섣달 스무 여드렛날에 혼례 치르고 요객(상객. 시아버님)은 하룻밤 주무시고 돌아가고,

신랑은 닷새를 묶고 돌아갔는데 나는 신랑 얼굴을 사흘 있다가 처음 봤어요.

 

그 때는 밥도 둘이 한 상에 차려 주는 법도 아니고 남자는 남자들끼리 먹고 여자는 여자들끼리 먹고 그랬으니까 얼굴 볼 틈이 있나.

 저녁에는 깜깜한데 들어가서 자고 하이 언제 볼 여가도 없고, 처음에는 부끄러워 쳐다 볼 수도 없고.

사흘 만에 처음 보이 참 잘 생겼드라꼬요.

 

 그 때는 신방 구경을 얼매나 하는 동 문구멍 뚫고 들바다 보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서로 볼라꼬 문짝을 띠내고 보고 그랬어요.

그 카면 부끄러워서 이불로 문 가리고 자고나면 아침에 어른들이 문을 찾아 달아주고 그랬어요.

 

 

신행을 시월 스무 여드렛날에 왔는데, 그 때 시댁은 여기가 아니고 영천군 화산면 매산동에 있었어요.

 6.25 전쟁 때 귀래정 옆에 있던 집이 불타고 해서 시 삼종숙(9촌 아저씨)이 거기에 살고 계셔서 피난 가서 살았어요.

 

신행 가는 날 눈이 설상가상으로 와서 집에서 운산역까지 걸어서 가는데 발이 푹푹 빠졌어요.

그래서 웃옷을 못 입고 보통 입는 옷을 입고 시집 동네까지 가서 옆집에서 갈아입고 들어갔어요.

 

우리 집에서는 딸 시집 보낸다꼬

엿 한 고리짝, 유과 한 고리짝, 어리(쌀강정) 한 고리짝 소고기 열 근, 명태 한 떼, 이부자리, 내 옷,

예단 등을 바리바리 해서 소바리에 싣고 또 하인(제궁지기)이 지고, 내 대반 들 여자 종(제궁지기 마누라)이 이고,

요객(상객)으로 백부가 함께 갔어요.

 

운산서 기차타고 신령까지 가서 신령서 시댁까지는 가마타고 갔어요.

시댁에 가이 내 큰상 차리고 요객 큰상도 차렸는데 없는 음식이 없이 참말로 상다리가 뿌러지게 차렸어요.

 

백부님이 하룻밤 묶고 가신다고 배별 상에 인사드리러 들어가니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져서 얼매나 울었든 동.

눈이 퉁퉁 부었어요. 원래 밭 노친이 가실려고 그랬는데 날 두고 떠나오려면 백부보다 맘이 더 아프다꼬 백부가 요객으로 오셨다 그래요.

 

기름이 버글버글 끓을 때  . . . .  

 

 

 

 

 

옛날 우리 친정에는 겨울만 되면 큰독에 찹쌀을 삭혀서 엿을 서너 말을 고았어요.

또 유과도 집에서 만들었어요. 유과는 냇가 에 가서 모래를 깨끗한 것으로 골라 얼개미에 내려가지고

가마솥에 넣어 불을 지펴 달궈지면 거기다 마른 차나락을 넣어 저으면 튀밥이 되거든.

 

그것을 다시 얼개미에 내려 모래는 버리고 튀밥은 모양 좋은 건 따로 골라두고,

남은 것은 방망이로 뿌솨가지고 얼개미로 쳐서 유과에 묻힐 고물로 만들어놓고.

 

찹쌀을 깨끗이 씻어서 물을 갈지 말고 이삼 일 담가 놨다가 건져서 호박에 빻아 가루를 만들어 솥에 푹 쪄내.

그 쪄낸 것을 다시 호박에다 꽈리가 나도록 찧어 국시 밀듯이 밀어 네모반듯하게 끊어 뜨뜻한 방에서 바짝 말려야 돼요.

 

 바람 치는 곳에서 말리면 절대로 안되거덩.

 바람 치는 곳에 말리면 갈라져서 유과가 모양 없이 돼.

 

그렇게 바짝 말린 것을 소두배(솥뚜껑)를 한데 걸어놓고

피마자기름이 버글버글 끓을 때 넣어 벙그렇게 튀가서 물엿을 묻혀 만들어 놓은 고물 묻히고 우에 모양내고 해서 큰일 때 마다 썼어요.

 내 시집 갈 때도 그렇게 만들어서 가지고 갔어요.

 

 

시집을 오니 시댁에는 시어른 내외분과 5남매(3남 2녀 중 신랑이 장남)가 살았어요.

어른들이 인품이 훌륭하고 동생들도 좋아서 어려운 것 모르고 살았어요.

 

 화산서 한 이년 살다가 전쟁도 끝나고 해서 이 자리에 집을 지어서 이사를 왔어요.

원래 귀래종 종택은 이 자리에 큰 골기와 집이 있었으나 6.25 때 폭격당해서 없어졌고,

다시 짓는데 돈이 없어 그렇게 크게는 못 짓고 작은 한옥을 지어서 이사를 왔어요.

 

나는 이사 와서 처음 이곳에 왔고 귀래정도 처음 보았어요.

처음 와서 보이 귀래정 경치가 얼매나 좋든 동.

 

 귀래정 밑으로 바위로 된 절벽이 있고

그 밑을 낙동강이 휘돌아 흘러가는데 거기서 소를 이루고 돌아가니 물이 파랗고 깨끗한 게 바위에 철석거리제

주변에는 고목나무들이 있제 경관이 일품이랬어요. 

특히 아침에 안개가 끼었을 때 경치가 제일 좋았어요.

 

그렇게 여름에 시원하고 경치 좋은 귀래정 마루에 나는 한 번도 올라가 쉬어본 적이 없었어.

사느라고 바빴기도 했지만 옛날에는 정자에 여자들이 출입을 하지 못했거든요.

 

 

아뱀이 한학을 하시고 우리 집은 좀 큰집이라서 친구 분들이나 문중어른들이 자주 드나들었어요.

 여름에 하얀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귀래정 마루에 앉아 노시는 걸 보면 참 보기 좋았어요.

 

 우리 집은 불천위 종가가 아니라 4대 봉사만 했어요.

 

들일이나 길쌈은 안했지만 손님접대하고 아아들 키우느라 평생을 바빴어요.

어맴은 쫌 일찍 돌아가시고 아뱀은 회갑잔치 하시고 63세에 돌아가셨어요. 어른들 돌아가시고 흰옷 입고 삼년상 치렀어요.

 

 

나는 스물다섯 살에 첫 아들을 낳았어요. 시어른이 삼대 외동이라

"내가 혼자다 보이 외롭더라. 너는 아를 낳는 대로 낳아라." 라고 해서 그렇게 따른다고 6남매를 낳았어요.

 

아아들 키울 때는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는데 우리가 여기 살다보이 학교 다닐 때 지들이 힘들었제.

위로 아아들은 영호초등학교 다니니 여기서 걸어 다녔는데 겨울에 다리를 건너다니느라 힘들었제요.

 

 밑으로 아아들은 용상초등학교 다녔어요.

그 때는 용정교가 안 놓여서 반구정 부근에서 용상 안동병원 조금 위 부근까지 외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겨울에는 그걸 건너다녔으니 얼매나 추웠을니껴?

 여름에 비가 오면 나룻배타고 건너다니고 큰물이지면 영호루 앞 다리 건너서 강둑을 따라 올라가서 법흥교 건너 다녔으니

빤히 보이는 곳을 그렇게 돌아갔으니 힘들었제요.

 

 

10여 년 전에 정상동 택지개발 할 때

 16위를 폐묘했는데 그중에서 일선 문씨 할맴과 응자 태자 할뱀이 미라로 발견됐지요.

 

나도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상투가 한 아름이고 기골이 얼매나 장대하든 동 내가 섬뜩 하더니만 그 뒤에 몇 달을 아팠어요.

 

 때 우리 큰 아들이 애를 많이 먹었어요.

직장을 휴가내고 와서 시신을 모두 귀래정에 모셔놓고 밤낮으로 지켰으니까요.

 

 그 때 옷을 새로 갈아입히고 묘는 어담으로 이장했고요.

 벗긴 옷이랑 관, 거기서 나온 모든 것은 안동대학박물관에서 가지고 갔는데 한 트럭이 넘었어요.

 

정상동 택지개발 할 때 산을 판돈으로 문중에서 이집을 지었어요.

 집을 헐었으니 우리 내외는 서울 아들집에 가 있다가 다 지었다고 해서 와보니 이렇게 지어놨어요.

문짝이나 그런 것은 전부 미송을 쓰고 잘 했는데 기둥과 서까래를 시멘트로 지었으이 귀래정과 안 어울리는 것 같제요.

 

 안은 싱크대도 있고 해서 옛날 집보다 살기는 편하고 좋으이더.

이제 집도 새로 지어 편리하고 아아들도 크게 잘살지는 못해도 먹고사는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우리 내외나 건강하게 살아야 될껜데 영감이 만날 몸이 약한 게 걱정이래요.

 

귀래정종택

 

 

 

 

이야기 하며 놀고 싶다고 억지로 찾아뵌 귀래정 종가 어른들이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나올 때는 어느덧 친구가 되어 다음에 또 놀러 오라며 한사코 문 밖까지 배웅해주신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옛날 살아오신 이야기를 즐겁게 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고,

 나도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고향의 냄새를 실컷 맡을 수 있었던 두어 시간이었다.

 

안주인이었지만 바라보기만 한 귀래정,

앞으로는 더운 여름 날 귀래정 마루문을 시원하게 열어놓고 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이 많기를 빌어본다.

 

이번 에 섭외를 하면서 안동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실 고택 안주인들이 편찮으신 분들이 너무 많은 것이 걱정되었다.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면 누가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 줄 수 있을까?

이제 나마 우리 팀에서 고택나들이란 행사를 하게 된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모쪼록 팀원들이 합심하여 좋은 행사로 발전해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