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안주인이 들려주는 고택 살이

안주인 없는 집에 와서 안주인으로 살아오기

렌즈로 보는 세상 2011. 7. 31. 23:26

안주인이 들려주는 고택 살이

                                                

발행되는 지폐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우리 민족의 어머니상을 상징한다는

신사임당을 새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안동을 대표하는 어머니상인 정부인 장씨와 경당종택을 떠올렸다.

경북 안동시 서후면 검제 춘파에 있는 경당종가는

 퇴계 학맥을 학봉 김성일로부터 이어받아 외손 갈암 이현일에게 전수한

경당 장흥효의 종가이자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훌륭한 어머니이자 예술가인 정부인 장씨의 친정집이다.

 

 

그 곳은 사진 작업을 위해 여러 번 다녀왔던 곳이다. 어른 내외분이 친절하시고 종가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는 편이라 글의 자료가 될 만한 것을 듣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허락하시리란 생각은 들었지만 농사철이고 조금만 움직여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이런 복중에 부탁드리는 것이 망설여졌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큰맘 먹고 전화를 드리니 사랑어른이 반갑게 받으셨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뭐 그리 할 얘기가 많지는 않겠지만

내일이라도 괜찮으니 들리라고 하셨다.

 

 

반갑고 고마워 이튿날 오후 음료수를 한 박스 사들고 들렸다.

 마당에서 일을 하시던 사랑어른께서 손을 덥석 잡으시며 얼른 사랑채로 들라고 하셨다.

어렸을 적 한학을 하시던 아버지로부터 유교적인 예절교육을 받아서인지

사랑채로 선뜻 들어서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니 요즈음 세상에

그런 예법 따지면 불편해서 안 된다고 하시며 극구 들어오라고 하셨다.

경당종택이란 현판이 걸린 마루를 올라 사랑으로 들어가니

그렇게 무덥던 조금 전의 날씨와 다르게 들기름 칠한 장판의 서늘함과

전통한옥의 시원함에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방안을 둘러보니 푸세 질 하여 다려 놓은 흰 모시 두루마기가 눈부시다.

 

 

사랑어른과 이런저런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검은 삼베치마에 하얀 모시 상의를 입은 안주인이 소반을 들고 나오셨다.

경당종택 안주인 권순(70세)여사, 힘들고 팍팍했던 삶을  말해주듯

깡마르고 까맣게 그을린 모습이었지만 건강하게 강단이 있어 보이는 모습은 몇 년 전과 같았다.

이미 사랑어른과 이야기가 되신 듯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의 친정집답게

입에 짝 달라붙게 맛있는 감주를 권하며 종부님은 고택살이를 편안하게 풀어내셨다.

 

 

 

안주인 없는 집에 와서 안주인으로 살아오기

-다음은 경당 종부님이 구술한 것을 받아 적은 글이다-

 

 

경당종부 권순여사

 

영양 입암 문해 마을에서 안동 권 씨 산택재(권태시, 권태시공의 아버지 마애공은 경당 문인)종가에서

 선생의 11세 종녀(종손의 딸)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일찍 일본에 건너가 사업을 하셨고, 나는 조부모님과 어머니 밑에서

종가의 업무인 봉제사(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냄), 접빈객(내방하는 손님 접대)을 배웠어요.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영양에서 술도가를 하시던 큰 시누이 시어른(재령이씨)과

진보 샘재 외삼촌의 중매로 선도 보지 않고 지금의 종손(장성진.71)과 결혼했어요.

중매 말이 오갈 때 외삼촌이 시집 갈 집에는 시모(시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시집가면 밥을 해먹어야 한다고 해서

“여자 밥 해먹는 것은 당연하제요.” 하고 말한 것이 허락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혼 전 신랑의 군 동기(영양사람)가 새색시 감이 다리를 전(절름발이)다고 하더래요.

그렇잖아도 신부를 한 번도 보지 못해서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하던 신랑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울적하여 혼례를 하러 영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잔치에 쓸 떡을 만들려고 빻아놓은 떡가루에 다리 길이가 다른 색시 그림을 그려 놓고 한숨을 지었더래요.

그 모습을 본 시누이가 어른들께 얘기하니 어른들께서 오늘 신부 집에 가서

색시를 한 번 걷게 해보고 다리가 성하면 결혼을 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파혼을 하자고 결정하였대요.

 

 

혼례에는 본시 상객이 한 분 만 오시는 것이었으나 걱정이 된 시조부님과 시아버님 모두가 상객으로 왔어요.

시아버님은 진보에서 기다리시고 시조부님은 건너 동네에서 기다리시고 신랑과 신랑 친구 한 분만 우리 집으로 왔어요.

신부화장하고 혼례복 입고 족두리까지 쓰고 혼례식만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신부가 걸어가는 것을 봐야 예식을 올린다는 말에 기분이 나쁘고 황당했어요,

특히 우리 동생은

 “ 절대로 누님을 저 집으로 시집보낼 수 없다.” 고 하며 노발대발 했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있어요.

그 때만 해도 처녀가 약혼했다가 파혼하는 것도 큰 흠인데 하물며 결혼 당일에 파혼했다고 하면 큰일나지요.

 

 

할 수 없이 안채에서 아래채로 통하는 마루를 걸어 내려갔어요. 사랑문을 열어 놓고 있던 신랑이 그 모습을 보고

어른들께 연락하니 아버님은 시댁으로 돌아가시고 시조부님은 우리 집으로 오셔서 식을 치렀어요.

우리 집에서 이틀간을 묵고 3일 신행을 했어요.

어른들께 폐백을 드리는 모습을 본 잔치에 온 친척들과 집안 어른들은

“목단 꽃 같다.” 고 하며 건강한 신부가 들어온 것이 즐거워 만세를 불렀어요.

나는 새색시였지만 전 해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상주인 관계로 고운 옷을 못 입고 소복하고 시집을 왔어요.

 

 

이야기를 나누시는 부부 

 

  댁에는 손위 시누이 두 분은 출가 하시고 홀로된 시조부님과 시아버님 손아래 시누이 그렇게 살고 있었어요.

시조모님은 오래전에 돌아 가셨지만 시어머님은 네가 시집오던 전 해에 돌아가셔서 집안에 안주인이 없으니

 나이 어린 시누이가 살림을 하고 있었어요.

안어른이 안 계시는 집이라 체계적으로 시댁 살림을 배우진 못했지만

시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친정에서 보고 배운 대로 하니 살림하는 것은 별 어려움을 모르고 했어요.

 

시집와서 얼마 있다가 새 시어머님이 들어오셔서 살림을 하시고 시누이도 있고 해서

나는 신랑 직장(대구시청) 따라 대구에 가서 5년 정도 살다가

종가 지키러 들어오라고 해서 다시 시댁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시집오던 이듬해에 시조부님이 돌아가셔서 삼년상 치르고,

일 년에 열 네 번인 제사 지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언제나 새벽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화장해야 아침밥을 지었어요.

여자가 몸가짐이 단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이 32살에 이 집을 지었어요.

경당종택은 원래 광풍정 밑에 있었는데 우리가 결혼하기 오래전에 이 자리에 있던 300년 된 골기와 집을 사서 이사를 왔대요.

그 집은 지금 이집과 모양과 구조는 같았으나

규모가 작아 우리 아이들 사남매도 태어나 삼대가 한집에 살기에는 복잡했어요.

그래도 그럭저럭 살았는천장에서 비가세고 벽이 무너지고 해

고치려고 집을 헐어보니 목재가 썩어 쓸 것이 별로 없어 할 수 없이 다시 지었어요.

목수가 와서 상주하며 한 1년간 지었는데, 그 때 새참해주느라 무척 힘이 들었는데

다 지어 가지고 이사 들 때는 옛날 집 보다 칸살이 널찍하니 큰 게 얼마나 좋던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어요.

마음 같아선 춤이라도 추고 싶었어요.

 

 

 

경당종택 

 

 

버님 돌아가신지 13년 되었는데 살아계실 때 사랑에 손님이 그칠 날이 없었어요.

 손님이 오시면 내가 만든 칼국시나 묵, 감주, 식혜를 대접하기를 좋아하셨어요.

나는 내일 손님이 와서 점심을 드시고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 밀가루와 콩가루를 6:1의 비율로 반죽하여 두었다가 당일에 밀어요.

 그렇게 해야 얇고 쫀득한 면이 돼요.

국물은 멸치 다시 물로 하고, 고명으로 계란 갈랍(지단) 부쳐 채치고, 김 구워 채 썰고, 호박 채 썰어 볶은 것을 썼어요.

시어머님이나 시조모님이 계실 때 시집을 왔으면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특별한 음식 비법이라도 물려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분들이 계시지 않으니 뭐 물려받을 것이 있어야지요.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여름에는 시원한 건진국시를 겨울에는 따뜻한 칼국시를 정성껏 만들어 어른들을 대접했지요.

 

 

는 아이들을 4남매 두었는데 이제 모두 출가해서 자기 몫을 하고 있어요.

특히 큰 아들과 며느리는 한 집에 살고 있어요.

 내가 시집살이 할 때처럼 힘 든 일은 시키지 않지만, 요즈음 같은 세월에 종가에서 어른들과 한 집에 사는 것이 시집살이잖아요.

 애들이 불편하지 않게 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요.

자식들의 입장에선 그 흔한 딴살림도 못하고 힘들겠지만 우리 입장에선 정말 다행스러워요.

객지에 나가지 않고 집을 지키니 은연중에 종손과 종부의 삶을 익혀 우리 집의 전통을 이어나가겠지요.

                                                                                                                                                                                   

경당종택 후원                                            후원의 풀을 뽑는 종부님 

 

부님은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잠시 시간이 나면 잔디밭의 풀을 뽑으셨다.

안주인이 없는 집으로 시집와서 오늘이 있기까지 그런 부지런함이 그 아름다운 후원이 있게 하고,

 경당종택을 이끌어 나가는 힘의 근원이 되었겠지만

종부님 결혼 할 때의 그 목단 꽃 같이 풍성하고 아름답던 모습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 같아 가슴이 저려왔다.

 

* 전에 써놓았던 글을 다음뷰로 송고하지 않아서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