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철의 맛있는 배추로
일년 먹을 양의 김치 60포기를 담고 나서
몸살이 난 적이 있었는데,
사시사철 배추가 흔해빠진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그렇게 김치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되겠건만,
그 욕심의 근원은 순전히 김치냉장고 때문이었다.
김치 냉장고에 김치를 보관하면
일 년 동안 두고 먹어도 늘 한결같은 맛을 유지한다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서이다.
나는 김치냉장고 때문에 김장을 많이 했지만
어릴 적 우리엄마는 농사지은 배추를 갈무리 하는 방편이기도 하고
열 식구 겨울 반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김장을 했었다.
대체적으로 우리 집은 200포기 쯤의 김장을 한 것 같은데
( 그 때는 비료도 마음대로 사서 쓸 수 없는 형편이라 요즈음처럼 배추가 잘 되질 않았다.)
그 김치에도 등급이 있었다.
그 때 우리는 김치를 간을 짜게 하였다고 짠지라고 불렀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엄마는 곧 김장준비를 하기 시작하는데,
먼저 여름부터 정성들여 키운 배추를 깨끗이 다듬어서
속이 꽉 찬 것은 4등분 하고, 그보다 조금 못한 것은 2등분,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은 포기 채로 천일염에 절여놓는다.
그리고는 양념을 준비하는데
요즈음처럼 젓갈을 듬뿍 넣어 감칠맛 나는 그런 양념이 아니라
농사 지은 맏물 고춧가루가 아닌
두 번째 쯤에 딴 고추를 빻은 고춧가루와 소금,
마늘과 생강, 재피가루를 찹쌀죽에 반죽하여 버무려 둔다.
그렇게 준비한 양념을 다 절여져서 씻어 물을 뺀 배추와 함께 버무린다.
이 때 우리 집의 김치는 등급이 매겨지게 된다.
먼저 속이 노릇노릇하게 꽉 찬 배추는 포기짠지라고 하여
무채와 갓, 검은 참께로 속을 넣어 버무려
중 단지에 넣어서 땅에 묻어 보관하여 두고,
사돈이 오거나 큰 일이 있을 때만 상에 올렸다.
두 번째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푸른 잎이 거의 없는 배추를 숭숭 썰어서 앙념을 해
중 단지에 넣어서 땅에 묻어 보관하여 두고,
평소에 우리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와서
김치를 꺼내 놓을 일이라도 있으면 꺼내 먹는 그런 김치였다.
마지막으로 푸른 잎이 많고 속이 차지않은 배추를
우리는 퍼드럭배추라고 불렀는데,
그 배추는 숭숭 썰어 남은 양념이 많든 적든(대체로 양념이 적어 불그스름 했음)
그것들을 모두 버무려 어른 키만큼 키가 큰 독에 넣어
정지 가까운 그늘진 처마 밑에 보관해 두고
우리들의 겨울 내내 밑반찬으로 했다.
그 큰 김칫독에서 푹 익은 김치는
식량을 절약한다고 하루에 한 끼는 끓여먹던 벙그래죽(콩나물 갱죽)을
끓일 때는 없어서는 안 될 재료였다.
모든 물자가 모자랐던 시절에,
나보다 더 남을 공경하는 한 예로
우리 집 김치는 그렇게 등급이 있었고,
양념이 적게 들어가 배추 천연의 맛이 그대로 우러났던
그 맨 밑 등급의 김치는 우리 남매들의 마음의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