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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인 안동장씨

렌즈로 보는 세상 2009. 6. 25. 08:39

안동이 낳은 인물들은 많지만

유교의 이념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던 조선시대에는 훌륭한 인물의 거의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그 남성들 속에 우뚝선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정부인 안동장씨이다.

 

문화관광부는 조선중기 시문과 서·화에 능할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에 귀감을 보임으로써 후세에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추앙 받은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 : 1598∼1680)를 1999년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여성이 문화인물로 선정된 것은 신사임당에 이어 두 번째이다.

정부인 장씨는 안동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에서 1598년(선조 31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장계향이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내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성리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이고,

 어머니는 첨지(僉知) 권사온(權士溫)의 딸이다.

 19세에 출가하여 재령(載寧) 이씨인 석계(石溪) 이시명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

 이시명은 전실(前室) 김씨로부터 1남[상일(尙逸)] 1녀를 얻었으며,

둘째 부인 장씨로부터 6남[휘일(徽逸), 현일(玄逸), 숭일(嵩逸), 정일(靖逸), 융일(隆逸), 운일(雲逸)] 2녀를 두었다.

 장씨 부인은 7남 3녀를 훌륭히 양육하였던 것이다.

셋째 아들 현일(玄逸)이 쓴 광지(壙誌) (1844년에 간행된 <貞夫人安東張氏實紀>에 수록)와 한글로 번역한 장씨 부인의 실기에는

 부인의 여러 가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임신하였을 때에 언행을 옛 법도대로 하였고,

 자애로움과 엄격함으로 자녀들을 가르쳤으며,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훌륭한 필적을 남기기도 하였고.

음식디미방이라는 요리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궁체로 쓰인 필사본으로,

표지에는 '규곤시의방'이라 이름붙여졌으며, 내용 첫머리에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 써있다.

음식디미방은 한자어로 그중 '디'는 알 지(知)의 옛말이며, 제목을 풀이하면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을 지닌다.)


흉년 기근으로 민생이 참혹할 때 굶주리는  사람들의 구휼에 정성을 다하니

사방에서 모여든 행인이 집 안팎을 메워 솥을 밖에 걸어 놓고 죽과 밥을 지어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였다.

 의지 없는 늙은이를 돌보아 먹이고,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고 길러 성취시키는 등 인덕과 명망이 자자하였다.

부인의 평생 쌓은 덕이 이러하기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지성으로 축수하여  아무려나 이 아기시님 수복 무강하옵소서.

우리 몸이 죽어 귀신이 되어도 이 은덕을 한 번 갚기 소원이라  하였다.

친정 부모와 시가 부모를 모시고 봉양함이 극진하여 몸소 효의 실천을 보이시니 그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되었다.

장씨 부인의 행실과 덕이 이렇게 높고 83세에 이르기까지 자녀 가르침에 힘을 쏟으니

 이로부터 재령 이씨 가문은 더욱 크게 일어나 훌륭한 학자와 명망 있는 인물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부인은 1680년(숙종 6년)에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었다.

장씨 부인이 생애의 말년을 보냈던 집은 현재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원리동(院里洞)의 두들마을에 있고,

부인의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수동(壽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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