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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허스님의 나라사랑이 배여있는 절 봉선사

렌즈로 보는 세상 2012. 9. 10. 08:14

 

 

남쪽지방에 살다보니 북쪽의 절을 찾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봉선사는

연꽃사진을 올리는 블로거들의 소개로 간간이 접하는 절이다보니

연꽃이 아름다운 절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답사를 하고 보니 비록 전각들이 오래되진 않았지만

유서 깊고 이야기가 많은 절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1900년대 봉선사 주지를 지낸

운허(이학수.1892-1980.  항일투사, 불경 번역가,  후학양성)스님의

나라사랑이 배여있는 절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들어가니 주차장 끝 부분에 이런 일주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조계종 제25교구 본사로 8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절답게 네개의 기둥이 가지런한 일주문도 웅장하다.

그러나 그 웅장함을 편안하게 하는 '운악산 봉선사' 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기위한 봉선사측의 배려라고 생각하며 일주문을 지났다.

 

 

 

일주문을 지나자 오른쪽에 이런 비석과 부도탑 밭이 보이고

 

 

그 끝머리에 '춘원이광수기념비'가 있다.

이 비는 춘원 이광수와 육촌간인 운허스님이 

‘내 생전에 그분의 기념비라도 세웠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춘원의 부인 허영숙여사의 말을 듣고 1975년에 세운 비란다.

비에는 춘원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운허스님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춘원선생은 친일파로 낙인 찍힌 분이였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독립이 돼고 오갈데 없는 춘원선생을 운허스님이 이곳에 피신하게 하였단다.

''무정'등을 남긴 훌륭한 소설가였지만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말년이 불행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선사 전경

 

 

선열당 뒤 산에서 바라본 봉선사는 오래된 건물이 없다.

 

봉선사는 969년(고려 광종 20) 法印國師 坦文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의 이름은 雲岳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초창기에 이름이 미미하던 절을 1469년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운악산에 능을 마련하고 세조의 능침사찰로서 봉선사를 중창하였다고 하니 절의 규묘가 짐작이 간다.

'왕비가 죽은 남편을 위해 세운 절이니 얼마나 많은 정성과 재물을 쏟아부었겠는가!'

그런 봉선사가 여러번의 소실을 겪으면서 유지되어 오다가 6.25를 겪으면서 삼성각을 제외한 전각들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지금의 전각들은 그 이후로 하나씩 복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봉선사는 다른 절집과 다르게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이런 회랑이 보인다.

마치 안동에서 많이 보던 양반댁의 문간채를 보는 것 같아 절이란 느낌이 확 줄어든다.

 

 

 

청풍루 밑을 지나 큰법당으로 들어가는 길.

길게 줄지어선 촛불에서 본사다운 면보를 엿볼 수 있다.

 

 

청풍루 아래에서 바라본 큰법당 경내의 모습.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지어진 '큰법당'은 일반적으로 쓰는 대웅전이란 이름을 달지 않고

스님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스님의 나라사랑이 이런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일주문에도 '운악산 봉선사'란 현판을 달았구나!

 

 

 

봉선사 괘불.gif : 0.204MB

큰법당 앞에 있는 괘불을 올릴 때 쓰는 기둥과   유형문화재 제 165호 괘불(사진-진접읍사무소).

1735년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길이 7.5m, 폭 4.58m로 석가탄신일이나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이 기둥에 걸어서 사용한다.

화사한 색조를 많이 쓴 괘불이 걸린 봉선사의 풍경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다.

 

 

 

 

'큰법당'의 주련도 한글이다.

절에 갔을 때 읽을 수도 없는 어려운 한자로 되어있는 주련에 비하면 얼마나 쉬운가!

작은 발상의 전환이 중생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것 같다.

 

 

 

'큰법당' 옆의 '지장전'에서는 망자의 혼을 달래고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독경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죽어서 재를 올리는 것도 좋지만 살아있을 때 경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텐데...

 

 

 

'큰법당' 옆의 '관음전'에서는 남자 신도가 긴 염주를 굴리며 기도를 하고 있다.

누굴위해 기도하는 지는 모르지만

남자분이 이렇게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에서 그 기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관음전' 옆의 장독대.

큰절답게 아름드리 장독들이 즐비하다.

언제 한 번 조용하게 들려서 이 항아리의 된장을 먹어보고 싶다.

 

 

 

'관음전' 뒤에 있는 '삼성각'.

6.25 때에 소실되지 않은 봉선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가을 햇살같은 맑은 날에 찾은 봉선사.

맑은 햇살에 '삼성각' 풍판과 걸개가 이름답다.

 

 

 

 

근대의 봉선사 조사스님들을 모신 '조사전'.

 

 

 

봉선사에는 '판사관무헌'이란 특별한 이름의 건물이 있다.

왕의 위폐를 모신 절이라 어실각이 있던 절 봉선사에 조선왕실은 주지스님께 '봉향판사' 작위를 수여했다.

따라서 주지스님의 처소인 이 건물을 지금도 '판사관무헌' 이란 편액을 달아서 그 명예를 기리고 있다.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의 사물이 있는 '범종루'.

봉선사 '범종은 보물 제397호'로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아주 귀한 동종이다.

급하게 돌아나오다 보니 종을 자세히 보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에 들리면 좀 자세히 보고 와야겠다.

 

 

 

 

봉선사를 한바퀴 돌아나오는 길에 만난

지하를 식당으로 사용하는 선열당의 기와를 올린 담과 토속적인 꽃들이 조화롭다.

 

마치 봉선사가 운허스님(1892-1980.독립, 교육, 역경, 수행을 화두로 삼은 스님)의

나라사랑을 보여주는 한글 현판과 주련이

한자로 된 현판과 적절히 어울려서 더 아름다운 절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