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옛날 옛날에

[스크랩] 섣달이라 그믐밤

렌즈로 보는 세상 2009. 2. 12. 13:19

양력 섣달은 섣달도 아니다. 

잠이 들면 하얀 밀가루를 칠하고 눈썹이 쇠었다는,

방문 밖을 지나가는 차가운 겨울 바람의 웅성거림도 없다.


섣달 그믐.

재 넘고 꾸불텅 고개를 넘어 머리에는 불린 쌀을 이고 지고

방앗간을 찾는 설렘도 없다.

보릿고개를 막 지나온 핍절했던 시절,

아직도 곤한 기억이 남아 있는 까닭인지 

섣달 하고도 그믐밤이 아니면 꿈에라도 흰 떡국을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지


섣달 그믐이면 해숙이네 방앗간에는 원동기 소리가 요란하고

피댓줄이 8자로, 혹은 1자로 걸려 힘차게 기계를 돌리던 

그 들뜬 소란함이 그립다.


쌀이 귀하던 시절이라 조로 떡국을 빼는 집도 제법 있었는데

줄 지어 늘어섰다가도 바로 앞에서 조로 만든 떡국을 뺄라치면

다음 차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얼굴이 찌푸려졌다.

기계 속에 남은 조가 섞여 나와 하얀 가래떡이 흉측하게 변하는 까닭이다.


때로는 그 이유로 인해 동네 아지매들이나 할매들은

서로 티격태격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는데

그 무슨 흉한 인심이냐고 탓할 일만은 아닌 것이

그 시절, 송기를 벗겨 먹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보릿고개를 넘어온 아픈 기억이 모두의 가슴팍에

벌겋게 녹슨 못처럼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먹을 것이 지천에 널린 지금에야 그 깟 가래떡이 그 무슨 대수랴마는

조청에 찍어 먹는 하얀 가래떡 맛을 지금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일년에 단 한 번. 섣달 그믐밤에 갓 뺀 하얀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던 그 기억은 보내 놓고 돌아보는 지금

이토록 그리운 것은 내 어릴 적 순수, 혹은 설램이

뽀얀 김을 내뿜으며 기계 속에서 삐져나오던 하얀 가래떡이

서리서리 묻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섣달 그믐밤,

조청에 가래떡을 배불리 먹고 

이거리 저거리 갓거리를 하며 말 그대로 밤을 하얗게 새우리라 작정을 하지만

밀려드는 졸음을 참지 못해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보면

거울 속 내 눈썹은 허옇게 새어 있었다.


수 십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내 기억 속의 섣달 그믐은 

아직도 어제.

출처 : 가자 안동으로
글쓴이 : 미루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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