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섣달은 섣달도 아니다.
잠이 들면 하얀 밀가루를 칠하고 눈썹이 쇠었다는,
방문 밖을 지나가는 차가운 겨울 바람의 웅성거림도 없다.
섣달 그믐.
재 넘고 꾸불텅 고개를 넘어 머리에는 불린 쌀을 이고 지고
방앗간을 찾는 설렘도 없다.
보릿고개를 막 지나온 핍절했던 시절,
아직도 곤한 기억이 남아 있는 까닭인지
섣달 하고도 그믐밤이 아니면 꿈에라도 흰 떡국을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지
섣달 그믐이면 해숙이네 방앗간에는 원동기 소리가 요란하고
피댓줄이 8자로, 혹은 1자로 걸려 힘차게 기계를 돌리던
그 들뜬 소란함이 그립다.
쌀이 귀하던 시절이라 조로 떡국을 빼는 집도 제법 있었는데
줄 지어 늘어섰다가도 바로 앞에서 조로 만든 떡국을 뺄라치면
다음 차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얼굴이 찌푸려졌다.
기계 속에 남은 조가 섞여 나와 하얀 가래떡이 흉측하게 변하는 까닭이다.
때로는 그 이유로 인해 동네 아지매들이나 할매들은
서로 티격태격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는데
그 무슨 흉한 인심이냐고 탓할 일만은 아닌 것이
그 시절, 송기를 벗겨 먹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보릿고개를 넘어온 아픈 기억이 모두의 가슴팍에
벌겋게 녹슨 못처럼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먹을 것이 지천에 널린 지금에야 그 깟 가래떡이 그 무슨 대수랴마는
조청에 찍어 먹는 하얀 가래떡 맛을 지금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일년에 단 한 번. 섣달 그믐밤에 갓 뺀 하얀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던 그 기억은 보내 놓고 돌아보는 지금
이토록 그리운 것은 내 어릴 적 순수, 혹은 설램이
뽀얀 김을 내뿜으며 기계 속에서 삐져나오던 하얀 가래떡이
서리서리 묻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섣달 그믐밤,
조청에 가래떡을 배불리 먹고
이거리 저거리 갓거리를 하며 말 그대로 밤을 하얗게 새우리라 작정을 하지만
밀려드는 졸음을 참지 못해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보면
거울 속 내 눈썹은 허옇게 새어 있었다.
수 십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내 기억 속의 섣달 그믐은
아직도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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