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기도 둘러보기

폭풍한설보다 더 맵고 차게 죽어 간 소현세자 빈 강씨의 능 영회원을 가다

렌즈로 보는 세상 2013. 1. 16. 09:18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올 겨울 모처럼 좀 푸근하고 하늘이 맑고 깨끗하다.

이런 날에는 집에 만 있을 수 없다.  

차를 몰고  집을 나선다.  

 

 

 

 

 

 

광명사거리에서 광명IC방향으로 가다가 온신초등학교가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한다.

밤일 마을로 올라가는 길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저수지가 보이고 한티고개를 오르기 직전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국가사적 제 357호 영회원'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런 눈 덮인 날에는 이 나라의 세자빈(世子嬪)으로 졸지에 남편을 잃고,

여섯 아이의 어머니로 30대 초반에 시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

친정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어린 세 아들마저 귀양길에 올라 두 아들을 잃은 어미,

이런 아픈 사연을 간직한 소현세자 빈의 이야기가 어린

영회원을 들려  폭풍한설보다 더 맵고 차게 죽어 간

소현세자 빈 강씨의 삶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영회원> 으로 들어간다. 

 

 

그럼 여기서 잠깐 영회원(永懷園)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 가자

 

 

국가사적 제 357호 영회원

 

 영회원(永懷園)은 조선조 제16대 인조의 원자인 소현세자 빈 강씨(1611~1646, 민회빈)가 잠든 능원이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에 위치하고 있다.

 민회빈은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 소현세지와 볼모로 갔을 때 진취적인 기상과 지혜로운 처신으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조선 궁궐의 여성상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귀국후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하여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44년(1718년)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다시 복원되고 고종 7년(1903년)에는 무덤을 '영회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편도 2차선 도로를 내려 작은 농로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눈 덮인 애기능저수지.

가까운 곳에 애기능(영회원) 이 있어서 이름 붙여졌다는 애기능저수지,

 지도상에는 노온사지로 표시되어있다.

애기능저수지는 추운 날씨에 고기를 낚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빛 받아 반짝이는 흰눈이  아름답다.    

 

‘애기능'이란 어떤 능(陵)을 말하는 것일까?

옛사람들은 큰 무덤을 능(陵)이라 불렀다. 그 중에서도 임금의 능보다 좀 작으나 일반인들의 무덤보다는 큰 무덤이 애기능이다.

애기능은 강빈(姜嬪)의 묘소를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처음 죽음을 맞았을 때에는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보잘것없는 묘였으나

숙종(肅宗) 이후 복원되었기에 제대로 된 묘를 쓸 수 있었으니 이곳 민초들에게는 능으로 보였을 것이다.

 

 

 

 영회원(永懷園) 표지판.

애기능저수지를 지나 농장을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런 안내판이 있어 길을 안내한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라질 때마다 이런 안내판이 있다면 더 편리할 것 같다. 

 

그런데 소현세자 빈인 강씨의 묘가 왜 여기에 있을까?

강씨는 금천강씨로 이곳 아방리(현 노온사동)에 친정이 있었고, 

지금 능이 있는 곳은 선영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가 살아 왕이 되었으면 왕비가 되어 호화로운 무덤에 묻혔을 텐데 안타깝게 친정동네에 이름 없이 묻혔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서일까 날이 푸근해졌다고는 하지만 눈위로 불어 오는 바람 끝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영회원이라는 마지막 표지판이 있는 곳에는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가 영회원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400년이라면 세자 빈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이 느티나무는 세자 빈이 복원되어  영회원이라는 이름을 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단 말이다. 

진정 산 증인인데 말이 없구나!     

 

 

  

 

구름산 자락에 자리한 영회원이 보이는 진입로도 눈으로 가득하다.

아무도 다녀간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회원을 다녀갔는지? 아니면 구름산을 다녀 간 사람들의 발자국인지....

어쨌거나 능 주변에 사람의 발걸음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재작년 겨울 초입에 찾았을 땐 능을 찾은 사람의 흔적이 없었는데 철조망에 꽂아 놓은  꽃이 사람이 다녀갔음을 말해준다.

다행이다.

 서러운 죽음을 맞은 것만으로도 안타까운데 죽어서까지 잊혀져가는 소헌세자 빈을 찾아 묵념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능을 둘러친 철조망을 따라 능 뒤로 올라가도 사진을 찍을 만한 곳이 없다.

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밟고 올라서서 찍어 본다.

반쯤 눈 덮인 능은 겨울 오후 햇살이 반짝인다.

 

 

 

능에는 봉분,혼유석, 문인석, 석마, 석양,석호 등이 있으나  비석과 정자각은 남아있지 않다.

왕비로 남았으면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위용을 뽐냈을 텐데 말이다.

 

그럼 왜 소현세자내외는 인조의 미움을 사 죽게 되었을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 부부는 어느새 청인(淸人)들에게 소군(小君: 작은 임금)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그들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인조의 노여움과 불안감은 커져 갔다.

세자내외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가 아니라 청나라를 뒤에 업은 강력한 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9년의 볼모를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환대를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섬뜩하다.

소현세자 빈 강씨의 능에서 정치의 탐욕스러운 속성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지금 영회원은 철로된 울타리가 쳐져있어 들어가지는 못한다.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은 좋지만 외관상으로는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좀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영회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은 소현세자 빈의 회한이 서린 동산은 

 들어가는 진입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개인의 농장을 거쳐 들어가야한다. 

그리고 또 세자 빈은 죽어서도 철조망에 갇혔다.

그래서 영회원은 지금도 회한을 품은 동산이다.  

가까이 가서 석물들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지만 자물쇠가 채워진 영회원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영회원을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000으로 연락하세요>라는 작은 안내문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가까이서 보지 못하는 섭섭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길.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위에 우리의 발자국도 새기고 돌아 온다.

이 발걸음이 소현세자 빈이 조금이라도 덜 외롭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면 좋겠다.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옷깃을 여며야만 하는 날씨에  영회원 내려오는 길은 길게 눈 덮인 길이다.  

소현세자 빈의 슬픈 이야기를 듣고 오는 길이라 이런 눈 내린 길이 더 운치있다.   

이열치열을 이한치한으로 바꿔본다.

추운 날씨에 더 쌀쌀하고 추운 이야기로 추위를 달래본다는 말이다.

 

 

 

주로 구름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한적하던 길을 조금은 덜 심심하게 하는 발걸음으로 겨울 오후에 찾은 영회원 가는 길,

이 눈 녹은 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면 하며 길을 내려온다.

 

 

 

영회원을 돌아 애기능저수지로 내려 오는 길에서 바라 본 구름산은

여전히 슬픈 소현세자 빈의 이야기를 품은 영회원을 안고 의젓하다.

겨울철새들만 영회원의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전하겠다는 것처럼 무리지어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