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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청백리 - 오리이원익기념관

렌즈로 보는 세상 2013. 1. 22. 11:03

 

 

제 18대 대통령 취임식이 한 달 남짓하게 남은 싯점이다.

새로운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로운 관리들도 많이 배출될 것이다.

이런 싯점에서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이원익기념관' 찾아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의가 있겠다 싶어  

광명이 낳은 위인 오리이원익선생 기념관 찾았다.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선생의 기념관은 광명시청에서 광명KTX로 가는 도로 변 소하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하동에는 오리선생의  종가와 묘소 등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런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에 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오리이원익기념관'인 오리관은 기존 유물 중심에서 벗어나

 만화와 그래픽 등 다양한 패널을 설치해 오리 이원익의 생애를 유능한 지방관,

임진왜란 활약, 대동법을 시행한 정책가, 청백리한 인간 면모 등 다채로운 스토리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기념관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휴관일은 월요일로,

지하 1층, 지상 1층 대형 한옥 건물인 기념관은 전시실, 유물보존실, 강당 등이 들어서 있으며

1층 전시실에는 이원익 영정을 비롯해 오리집, 오리선생집, 자작시, 유서, 손자 수약에게 쓴 글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는 사본이긴 하지만 역시 선생의 초상이 걸려있다.

6점의 초상화가 전하는 것도 대단하고 그 중 3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도 대단하다.

그렇게 보관을 잘 했다는 것을 보면 후손들의 선조 사랑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선생의 연표가 그려져있어 슬슬 걸어들어가면서 선생의 일대를 엿볼 수 있어 좋다.

선생은 1547년(명종 2년)에 태어나셔서 1634년(인조 12년)에 돌아가셨다.

88세를 사시는 동안 많은 일을 하셨지만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그렇게 오르기 어렵다는 영의정을 두 번이나 하셨다니

선생의 청렴한 관리로서 자세와 인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오리이원익선생의 모든 정보는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충현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chunghyeon.org

 

 

 전시관은 많은 이야기들을 만화로 풀어내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편안하게 오리선생이나 조선의 역사를 배울 수 있어 좋다.

 

 

 

애민사상에 투철하였던 선생은 안주목사로 재직시 뽕나무를 심어 백성들을 가난으로 벗어나게 했다는 이야기도 만화로 풀어내고 있다.

관리가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선생의 그런 자세를 지금의 관리들도 배웠으면 좋겠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선생은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을 세금으로부터 부담을 덜어주었다.

'대동법’이란 물품을 징수하는 공물 대신 쌀이나 무명을 내는 세금 징수 제도이다

대동법은 1608년 영의정 이원익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었고,

이후 찬반양론의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는 가운데 1623년(인조 1)에는 강원도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순으로 확대되었고, 1708년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청렴결백하게 관리생활을 했으면 두 번째 영의정이 되었을 때까지 집 한 채가 없었던 말인가!

1624년이면 선생의 연세 78세로 그 때에 임금이 집을 하사하였단 말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선생은 그렇게 사셨으니 청백리에 선발되었을 것이다.

 

 

 

 

선생은 글 쓰기를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특히 오직 한 임금을 섬기기를 고집하여 목숨까지 잃은 정몽주를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전시관에는 정몽주의 시를 쓴 액자들이 많이 있었다.

유유상종, 세월을 뛰어넘어 함께하는 두 사람이 너무 보기 좋다.

 

 

 

 

글 쓰기를 좋아하는 선생이 손자에게 써 준 시.

'홀로 누각에 앉아 팔도를 바라보니

검은구름 흩어지고 달 그림자 외롭다

망망한 우주 무수한 사람 중에

몇 명의 사나이가 대장부인가'

시에서 선생의 손자에 대한 기대가 엿보인다.

 

 

 

 

 

오리선생은 충무공 이순신과도 인연도 깊다.

원균의 모함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난 이순신을 선조로 하여금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게 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선생은 관리로서도 위대하였지만

가정에서도 자상한 어른이셨다.

손자 수약에게 쓴 글에서는 선생이 평생 해왔던 관리로서의 자세와 삶의 방법을 상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한 나라의 영의정을 두 번이나 지냈지만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는 어느 범부의 글인양 다정하다.

그렇다. 이런 따뜻한 마음이 백성들도 사랑하게 하였을 것 같다.

 

 

 

 

정부가 새 대통령을 맞이하는 준비로 바쁜 철에 찾은 '오리이원익기념관'

'그 당시에는 60을 살기가 어려워서 60년을 살아낸 것을 축하하는 회갑연을 하는 게 큰 행사였는데

선생은 88세까지 사셨으니 상당히 장수를 하셨다.

새 정부에서 새로운 관리로 일하실 분들도 오리선생의 마음가짐을 따르다보면  백수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