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부곡

시인과 농부

렌즈로 보는 세상 2018. 7. 5. 06:00





수원 팔달문 주변 통닭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시인과 농부,

허름한 벽에 그려진 그림이나

시가 있는 곳.

내 젊음을 보낸 골목과 닮아있다.

내가 되고 싶었던

농사를 지으면서 글을 쓰는 사람,

시인과 농부.

그 이름 따라 옛날을 추억한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힘 든 농사일을 마친 저녁이면

희미한 호롱불 앞에서 돋보기를 쓰셨다.

그리고 오래된 문집이나

사서삼경을 청량한 초성으로 읽으셨고

우린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고는 했다.

그런 날 아침이면 우리가 쓰고 버린

헌 책이나 공책에는

검은 먹물로 쓴 아버지의 시가 적혀있었다.

막연하게 아름다웠다.












'시인과 농부를 겸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뛰어나게 산수가 고운 곳이 아니래도 좋다.

수목이나 무성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계절의 바뀜이 선명하게 감수되는

양지바르고 조용한 산기슭이면 족하다.'

로 시작하는 박두진의 수필

 <나의 생활 설계도>의 첫 부분이다.

여고시절 이 문장에 반하여

농사를 짓고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와 박두진 시인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여고를 졸업하고 나는 농부가 되었다.

기계화가 되지 않아

모든 일을 사람의 손으로 하던 시절,

장갑도 아껴가며 일을 하던 여름이면

내 손톱 밑과 발바닥은 언제나 풀물로 검었다. 

그래도 그런 것이 불만스럽지 않았던 것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늘 책을 가까이 하시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글을 읽는 선비,

  군자의 삶을 닮은 깨어있는 맑은 정신의 아버지,

그분을 닮고자했다.











그러나 세월 흐르면 흐를수록

버지를 닮기는 어렵고 어려운

길이란 걸 알게 되었고,

농사를 짓지 않은 남편과

결혼을 하고 도시로 나왔다.

살면서 글을 쓰는 농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생각한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작은 풀 한 포기

아름다운 들꽃 하나에 대한 단상도

기록하지 않았으면서 시는 뭔 시'

라고.....

그러나 그 때 틈틈이 읽은 책과

젊은 이가 없는 시골에서의 적막함이

내 생각의 깊이를 조금은 더 깊게 했음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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