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옛날 옛날에

내 어릴 적 정월 대보름

렌즈로 보는 세상 2019. 2. 18. 07:00




좀 쌀쌀하기는 하지만

햇살 고은 주말 오후에

수원화성 안 동네 행궁주변을 걸었다.

정월대보름이 코앞인 주말이라

행궁광장과 주변에서는 연날리기,

제기차기, 한국무 공연 등

대보름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족들과 또는 연인들,

친구들과 나온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한 얼굴이다.

내 어릴 적 대보름처럼.







내 어릴 적 정월대보름이면

어매는 지난 해 농사를 지어

용단지에 갈무리했던 찹쌀과

기장쌀, 수수, 팥, 대추, 밤을 넣어

가마솥 가득 오곡밥을 지었다.

찬으로는 설날을 지나 

볏짚 시루에 기른 콩나물과

얼지 않게 땅속에 갈무리했던

무를 넣어 끓인 시원한 콩나물국과

고사리, 도라지,

삶아 무친 배추 나물 등

삼색 나물을 만들었다.

대보름을 큰 명절이라고 생각하던 어매는

그날은 생선 반찬을 빠뜨리지 않고 준비했다.

 가을부터 생선을 이고

팔러오던 어매가 낮찌레기라고

부른 던 얼굴 긴 아지매에게서

산 고등어나 꽁치에 

무를 넣어 각종 양념을 한  조림이었다.

평소 보리쌀이나 좁쌀이

많이 섞인 혼합밥을 먹던 입에

각종 찰진 곡식으로 지은 밥인데

적당하게 달달하면서도

간간한 오곡밥은 얼마나 맛있던 지

그 맛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오곡밥을 먹고

우리는 아버지가 주시던

귀밝이술이라고 부르던

막걸리 조금을 마시고

호두나 강정으로 부럼을 씹었다.







그렇게 보름날 아침 의식을 치루고 나면

벌써 동네에서는 풍물소리가 들린다.

동네 청년들로 이루어진 풍물패들은

집집이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하여

한 해 운수대통을 기원한다.

그 때 풍물패들을 맞이하는

집주인은 형편이 닿는 대로 돈,

또는 곡식, 술과 안주를 내어주며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했다.

어린 우리들은 뜻도 모른 채

그 흥겨운 음악을 따라 동네

이집 저집을 드나들며 깔깔거렸다.








그렇게 하루 종일 헤헤거리면서

놀다가 보면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우리는 언니 오빠를 따라 

달구경을 하러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소쿠리 모양 동네에서 보는 달보다는

훨씬 일찍 달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어둑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꼭대기에는 생솔가지를

가득 쌓아놓은 달집이 이미 만들어져있다.

동네 청년들이 오후 내내 만들어놓은 것이다.

달이 떠오를 무렵에

가운데 넣어놓은 건불에 불을 붙이면

서서히 달집은 타기 시작했고

우리는 떠오르는 달과

그 길게 올라가던 불기둥에 환호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나무가 타서 숯이 되면

오빠들은 빈 꽁치 통조림통에

숯을 넣어 돌리는 쥐불놀이를 했다.

검은 밤하늘에 둥글게 원을 그리거나

8자를 그리며 돌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지만 우리 여자애들은

그저 그 모습에 감탄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시절에는 여자는 곧 요조숙녀가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꼭대기에서 바라본 이산 저산에는

달집 태우는 풍경으로 가득했고

그 불빛은 밤이 이슥해서야 사그라져갔다.

낯에 종종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니고

높은 산까지 올라온 우리 꼬맹이들은

피곤함과 달집에서 나오는 훈훈함에

맨땅에 앉아 잠이 들었다.

잠든 우리는 일꾼이나

어른들 등에 업혀서

마을로 내려오고는 했다.

처음 업힐 때까지는 잠이 들어 몰랐지만

울퉁불퉁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다 보면

금방 잠이 깼지만 우린 잠든 척하고

동네까지 업혀서 내려왔다.

어쩌다가 만난 그 호사를

선뜻 버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렇게 어릴 적 아름다운 대보름을 함께했던

동네 대부분의 어른들은 세상을 떠났고

지게작대기 춤을 잘 추던

영구아재도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흥겹게 징을 치고

장구와 꽹과리를 울리며

상모를 돌이던 풍물패들도 칠순이 넘었다.

머잖아 그 추억의 동네 사람들은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날 것이고

나의 이 아름답던 추억도 가물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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