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가까워 오는데 우리 친구들은 벌초를 하고 갔나?
며칠 전에 나도 우리 신랑하고 벌초를 다녀왔는데,
자주 해보지도 않은데다 솜씨까지 없는 그이가
벌초한 산소의 모습이 마치 소가 풀을 뜯어 먹은 풀밭의 모습이라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내가 못하는 일 중얼거려 봤자
잔소리 밖에 되지 않을 테니 참기는 했는데,
봉분은 아무리 봐도 우리 어릴 적에
머리에 헌디(종기) 나서
그곳은 머리를 짧게 깍아 주었던
그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고 한 소리했다.
그렇게 깔끔하지 못한 산소를 보면서
옛날 아버지가 방금 이발소에서
이발을 한 듯한 모습으로 다듬어 놓았던 우리 조상들의 산소를 생각했다.
찌는 듯한 더위도 한풀 꺽이고,
서늘한 가을바람에 곡식들이 일렁이기 시작하는 음력 팔월이 오면,
아버지는 바쁜 일손을 쪼개어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
독자이신 아버지는 벌초를 해야 할 산소가 10기 정도로 유난히 많았지만,
도시에 나가있는 당숙부님 몫의 산소까지도 벌초를 하셨다.
낮에 농사일로 바쁘신 아버지의 벌초는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하시는 식전 일이었다.
새벽 다섯 시쯤에 일어나셔서
전 날 저녁에 먹다 남은 국수나 감자가 있으면 드시고
서너 자루의 낫을 숫돌에 갈아
시퍼렇게 날을 세운 뒤 지게에 꽂고 산
소에 풀 내리고 온다시며 집을 나서셨다.
그렇게 나가신 뒤 두어 시간이 지나서
지게에 풀을 가득 담아 지고
앞산을 내려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마당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베잠방이는
언제나 이슬에 젖어 있었지만 얼굴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들여 지고 온 풀은
소여물이 되기도 하고
이듬해 농사지을 거름의 재료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8월의 10여 일간 정성들여 벌초를 한 산소는
10월이 되어 시사를 지내러간 우리 남매들에게는
마음 놓고 딩굴 수 있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2005 . 9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