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진이야기

배병우

렌즈로 보는 세상 2007. 6. 26. 15:46
자연·고향 아우르는 시인과 사진작가의 눈맞춤
[새책 읽기] 시인 황학주, 사진작가 배병우 사진에세이 <고향>
텍스트만보기   이종찬(ls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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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황학주 글, 사진가 배병우 사진 <고향>
ⓒ 생각의나무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방직공 누이가 생각나는 으아리꽃. 그 누이가 생각나는 으아리꽃. 그 누이가 좋아하던 벚꽃. 아, 나그네가 꽃잎 흩날리는 벚나무숲을 지나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그러고보니 그 숲에 사람들의 모습조차 없을 때가 있다. 영혼마저 빨려들 것만 같은 불안한 그런 꽃나무숲이 있다. 어디선가 "죽자, 같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13쪽, '꽃' 몇 토막

시인 황학주가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윗도리를 벗어던졌다. 그런 황학주를 지켜보던 사진작가 배병우는 아예 아랫도리까지 벗어버렸다. 아프리카는 한때 시인 황학주가 원주민과 함께 살았던 곳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여행자로서 바라보았지만 시인 황학주는 아프리카를 생활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때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국가와 인종은 달라도 자연은 모두 같다는 것, 즉 '고향'은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사실이었다. 시인은 아프리카에서 원주민과 생활하며 모두 같은 자연, 그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됨의 뿌리인 고향을 되찾는다. 더불어 그 고향사람들(원주민)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 것을 다짐한다.

근데, 사진작가 배병우는 왜 시인 황학주가 하는 일에 바지까지 벗었는가. 둘은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이는 황학주의 고향이 남쪽 바닷가 근처의 광주이고, 배병우의 고향이 여수라서가 아니다. 둘은 지천명의 나이를 먹는 동안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자연 속에 밀어 넣고 살았다. 그리하여 둘은 자연은 시공을 떠나 태초의 고향이라는 것을 깨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 "호박꽃 속에 내가 가두었던 별들에게 물었다. 그대는 꽃과 계신가요, 꽃 밖에 계신가요"
ⓒ 생각의나무
▲ 이제 나는 내 오랜 추억의 작은 창고에서 물과 오름과 숲과 바위, 꽃같은 것들을 끄집어내어, 두 손을 모두고 그 위에 펼쳐본다
ⓒ 생각의나무
고향은 끝없는 연민과 보살행이 이루어지는 곳

"이제 나는 내 오랜 추억의 작은 창고에서 물과 오름과 숲과 바위, 꽃같은 것들을 끄집어내어, 두 손을 모두고 그 위에 펼쳐본다. 그러고는 나에게 나지막이 묻는다. 우리가 아직 자연과 함께일 수 있다면 이 세계는 그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살만하지 않은가 하고." - 황학주 '프롤로그' 몇 토막

시인 황학주(52)와 사진작가 배병우(56)가 꽃, 바다, 바위, 소나무, 숲, 오름 등 6가지를 주제로 내건 사진에세이집 <고향>(생각의나무)을 펴냈다. 배병우가 사진을 수채화처럼 펼치자 황학주가 아름다운 글꽃을 피운 것이다. 그들은 이 책에서 다시 한번 서로의 속내의 빛깔이 같은 색이라는 것을 알았고, 다시 한 번 고향을 만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향이 있다. 아니, 생명을 가진 것이나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나 고향이라는 것은 반드시 있을 게다. 고향이란 내 부모님의 부모님, 내 자식의 자식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 황학주와 사진작가 배병우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고향은 단순히 어떤 삼라만상의 몸이 비롯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고향은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사람됨의 뿌리이다. 더불어 모든 상처 입은 생명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보살행이 이루어지는 곳 또한 고향이다. 즉, 고향은 마음과 몸의 지향과 마음과 몸의 실천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에게 있어서 자연과의 만남은 곧 고향과의 만남이다.

▲ "바다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의 가장 너른 제단이다"
ⓒ 생각의나무
▲ 바위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상도 드물다
ⓒ 생각의나무
"물이 없는 하늘엔 구름이 없다"

"밀물과 썰물이 없었다면 이 지구별은 얼마나 적적했을까. 달이 그저 바닷물을 밀고 당기고 끌며 놀고 있다고 생각해도 재밌지만, 그런 달의 장난이 없었다면 지구별의 시원이 얼마나 고적했을까 싶다. 밀물과 썰물은 지구별이 숨쉬고 있는 느낌을 육체로 가져온다. 내가 들숨을 쉴 때 밀물져오는 몸, 내가 날숨을 쉴 때 썰물져가는 몸." - 34쪽, '바다' 몇 토막

시인 황학주는 사진작가 배병우의 바다 사진을 바라보며 사람은 물로 빚어진 존재라고 여긴다. 칠 할이 물인 사람은 "날마다 밀물과 썰물을 맞으며 달과 우주와 놀고 있는 해변의 어린아이들 같은 존재"다. 이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만물의 근원도 물이다. 하긴 물이 없는 만물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황학주는 사람은 물을 따라 삶의 터전을 건설했다고 쓴다. 이어 "인간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한 곳도, 소박한 공동체들이 문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했던 것도 물"이라고 되뇐다. 맞다. 또한 이 따위 정도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렇다면 시인 황학주가 그런 어설픈 상식이나 늘어놓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일까. 아니다. 시인은 물의 뿌리를 더듬는다. 시인은 "언제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보다 구름 몇 개 떠 있는 쪽이 낫다. 내 기억에, 구름이 없는 맨하늘은 빈 물대접 같은 서늘한 느낌을 주곤 했다"고 귀띔한다. 그리고 "물이 없는 하늘엔 구름이 없다"고 맺는다.

▲ 소나무는 지상 최고의 미학적 구조물이다
ⓒ 생각의나무
▲ 숲은 얼핏보면 동어반복 한다
ⓒ 생각의나무
바위에도 핏줄이 있다

"바위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상도 드물다. 기이하고 웅장하고 소슬하고 아름다운 바위와 돌을 볼 때마다 나는 도무지 아는 게 없어진다. 말 배우는 아이처럼 눈을 꿈뻑이며 묻게 된다. 세상의 바위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로키산맥의 구중궁궐만한 바위산들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면 길이를 한눈에 들이지 못할, 대양을 건너는 대붕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 52쪽, '바위' 몇 토막

황학주는 바위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구두 한 짝이 벗겨져 허둥거리며 따라가는 지상의 한 인간"이라고 빗댄다. 이어 그 생명이 없는 바위들이 삼라만상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으며, 바위는 그 삼라만상의 모습으로 다시 생명 있는 삼라만상이 꿈틀대는 이 세상을 굽어보거나 치어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바위가 만족함의 달인이라고 말한다. 왜? 어떤 바위도 스스로 못마땅해 사람처럼 신경질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은근슬쩍 바위 위에 엉덩이를 갖다 댄다. 바위 위에 앉아서 듣는 새소리로는 소쩍새 소리보다 솔부엉이 소리가 더 제격이다. 솔부엉이 소리에는 마치 "바위의 우묵한 힘줄이 어디 가까스로 닿은 천공 같은 데에 걸쳐진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시인은 고백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조선대학교 뒷산이나 증심사 산속 바위에 누워 많이 울었다"고. 그리하여 "바위에도 핏줄이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날 뒤엔, 긴 장마가 시작되곤 했다"고. 시인은 자신의 청소년기가 왜 그렇게 외로웠는지 묻기 위해서는 부모님보다 저 바위에게 물어보라고 되뇐다. 어른이 된 지금도 자신을 받아 앉혀준 바위가 많다며.

▲ 오름은 언제나 내게 스승일뿐
ⓒ 생각의나무
아슬아슬한 희망을 먹고 살아간다

"바다는 내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고, 제주도는 80년대부터 다녔다. 제주도는 산과 수평선과 계곡이다. 나는 원래 바다에서 시작했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천착하고 있다. 도시보다는 시골을 좋아하고 양주보다는 소주를 좋아하며, 산과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 사진작가 배병우

사진에세이집 <고향>은 '자연'을 향한 시인과 사진작가의 눈맞춤이다. "우리가 아직 자연과 함께일 수만 있다면, 이 세계는 그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살만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시인 황학주나 "소나무는 아버지이고, 바다는 어머니다"라고 말하는 사진작가 배병우의 말처럼, 사람들의 '고향'은 곧 자연이며, 자연은 곧 태초의 이미지이다.

▲ 시인 황학주
ⓒ 생각의나무
시인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루시>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갈 수 없는 쓸쓸함>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너무나 얇은 生의 담요>가 있으며, 시화집 <귀가> <두 사람의 집짓는 희망>, 사진시집 <아프리카, 아프리카>가 있다.

장편소설로는 <세 가지 사랑>이 있으며, 산문집 <아카시아> <땅의 연인들> <인디언 마을로 가는 달>을 펴냈다.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와 국제민간구호단체인 '피스프렌드' 대표, '국제사랑의봉사단' 이사를 맡고 있는 시인은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 부족과 캐나다의 모학 부족 인디언보호구역에서 5년 동안 활동한 바 있다.

사진작가 구본창과 더불어 한국 사진의 세계화를 이뤄낸 사진작가 배병우는 195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풍경을 넘어서> <사진-오늘의 위상> <사진-새로운 시각> 등 여러 기획전에 참가했으며, 나라 밖에서는 일본(96년), 9토론토(97년), 시카고, 파리(98년), 스페인(2006년)에서 전시를 했다.

지금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한국 작가의 사진 중 역대 최고 판매액인 6만4800달러(한화로 약 6123만원)에 낙찰되었다. 더불어 이 사진을 영국의 팝스타 엘튼 존이 1만3200달러에 사들여 세계 사진가들이 놀라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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