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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석물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조선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

렌즈로 보는 세상 2013. 4. 29. 06:52

 

 

 

지난 번 태릉을 갔다가 강릉을 가보지 못하고 온 것이 늘  안타까운 마음이라 언제 한 번 가본다는 것이

이래저래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태까지 가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큰딸이 외손녀 정원이를 좀 봐랄고 해서 딸네 집에 갔다가 오면서 늦은 오후에 잠깐 들려서 소원을 풀었습니다.

지난번 태릉에 갔을 때가 평일이라 능에는 올라가지 못했는데

이곳 강릉은 능 출입을 통제하지 않아서 능과 석물들을 마음 껏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오늘은 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1534~1567)과 그의 비 인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강릉(사적 제201호)

석물들을 중심으로 제가 공부한 것을 올리겠습니다.

 

 

 

연록의 이파리들 사이로 햇살 부서지는 오후 늦은 시간에 찾은 강릉은 태릉만큼은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긴 것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강릉을 간다고 태릉에 내리시면 안됩니다.

저도 지난 번 태릉에 갔을 때 강릉 안내도가 있길래 같은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강릉은 서울시내에서 가면 태릉을 지나 삼육대에서 내리면 정문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강릉 경내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홍살문 너머로 정자각과 비각 그리고 멀리 능이 보입니다.

 

 

강릉은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입니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하여 쌍릉으로 조성하였습니다.

강릉은 명종과 왕비의 능인데도

문정왕후 혼자가 묻힌 태릉에 비하면 그 규모가 굉장히 작습니다.

살아서도 세상을 떵떵 울리며 살았던  어머니(문정왕후)와

그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왕의 위치가  죽어서도 그대로인 것 같아 기분이 조금은 씁쓸합니다. 

 

 

강릉의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정자각입니다.

 

 

 

이렇게 상차림을 하고 제사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안타깝습니다.

강릉의 제향일은 매년 4월 넷째 일요일(양력)이라니 하루만 늦게 가도 만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곡장과 석물들에  둘러싸여있는 강릉

 

명종은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환, 자는 대양이며 태어나자마자 경원군에 봉해졌고,

이후 인종이 즉위하자 1544년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 왕위를 이었습니다.

 

명종은 유일한 아들이었던 순회세자를 이른 나이에 잃고, 2년 후에는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여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워낙 병약했던 명종은 세자와 모후를 잃은 허탈감에 마음의 병까지 더하여

34세의 나이로 1567년(선조 즉위)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습니다.

묘호를 명종, 능호를 강릉으로 정한 후 같은 해 9월 22일 태릉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8년 후인 1575년(선조 8) 1월 2일 44세를 맞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였고,

선조는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그 해 4월 28일 명종 왕릉인 강릉에 쌍릉으로 왕비릉을 조성하였습니다.

 

 

 

 

무,문인석 너머로 쌍분으로 조성된 강릉

 

 

곡장(曲墻)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동, 서, 남, 북 사면으로 담장을 쌓는데 이를 곡장이라고 합니다.

곡장은 왕실의 묘인 능과 권에만 설치할 수 있습니다.

곡장(曲墻)은 능 위쪽에서의 토사(土砂) 유입을 막는 실질적인 기능과 혈의
생기를 흩어버리는 바람을 막아주는 풍수지리상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능침(陵寢)을 아름다우면서도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합니다.

석물(石物)

무덤 돌로 만들어 놓는 물건. 상석, 석주, 석인(), 석수() 따위 있습니다.

 

 

 

난간석과 병풍석에 둘러싸인 능침

 

능침(陵寢)

병풍석 위에 둥그렇게 잔디가 있는 봉분을 말합니다.

 

 

난간석(欄干石)

 

난간석(欄干石)은 잡인과 짐승등의 접근을 막고 호석을 보다 튼튼하게 지지해 주기 위해서
봉분(封墳)의 주변에 둘러 놓는 돌로 만든 울타리입니다. 난간석의 높은 기둥은 석주(石柱),
석주를 가로질러 진입을 가로막은 것은 죽석(竹石), 죽석의 중간을 받치고 있는 작은 기둥은
동자석주(童子石柱)라고 합니다.

 

 

 

 

모란과 12지신상이 양각 된 병풍석

 

병풍석(屛風石)

왕릉 봉분을 병품처럼 사대석이 휘두르고 있기에 흔히 병풍석이라 합니다.

봉분 침해와 해충 침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병풍석 면석의 양각

 

 

 

 

강릉의 장명등

 

장명등(長明燈)은 사찰의 석등을 모방하였는데 유택에서 형식상 불을 밝히는 상징적 의미로 세웠습니다.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은 죽은 임금을 모시도록 돌로 만들어 세우는 문관과 무관의 형상입니다.

문인석은 관(冠)을 쓰고 홀(笏)을 쥐고 있으며 좌우 한 쌍을 배치하며

무인석은 갑옷에 검을 들고 문인석 다음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우 한 쌍을 배치합니다

 

 

 

 

 크고 웅장한 상석(床石)고석도 대단합니다.

 

왕의 혼령이 나와 앉는 곳이라하여 혼유석(魂遊石)이라고도 합니다.

상석을 괴고 있는 북 모양의 돌을 고석(鼓石) 또는 족석(足石)이라고 하며, 한 개의 고석
4면에는 귀면(鬼面)을 새겨 넣었는데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강릉의 석호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은 난간석의 바깥쪽에 세워두는 돌로 만든 양과 호랑이입니다.

석양과 석호는 능 주인의 명복을 빌고 귀신이나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역할을 합니다.

 

신라 시대에는 왕릉 주변에 돌사자를 세워 놓았고 고려시대에는 주로 석구(石狗)를 세워

놓았으며 고려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석호와 석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왕릉에는

석호와 석양을 각각 4기씩 밖을 향하도록 세워두었으며 추존된 왕의 경우에는 각각 2기씩 세워두었습니다.

 

 

강릉의 석양

 

사진 가운데에 뽀족한 석물이 망주석으로

먼 곳에서 능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표지로서 영혼이 자기의 유택(능)을 찾아오게 하는 안내 역할을 합니다.

 

 

 

 

꽃 지고 새잎 파릇한 주말 늦은 오후에 찾은 강릉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긴 전에 다시 본

  줄지어 늘어선 문,무인석과 석마가 따스한 햇살에 느긋합니다.

이런 석물들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서 제 기분도 느긋하고 좋습니다. 

 

 

 

능을 내려와서 다시 만난 비각과 정자각

 

강릉은 건물들이 참 단촐합니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정자각과 비각 외에는 아무 건물도 없습니다.

비각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아직 문 닫을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도 비각 문은 굳게 잠겨있어서 들여다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만큼

어느 왕릉을 가더라도 그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햇살 곱게 내리는 봄날 늦은 오후에 찾은 강릉도 역시 아름답습니다.

 

거기다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기까지 합니다.

문 닫을 시간이 되어서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태릉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강릉은 모르고 있어서일 것 같습니다.

40년 동안 문을 굳게 닫았다가 2013년 1월 1일부터 개방했으니까요.

 

입장료가 없는 것도 좋고,

 능을 올라 마음껏 능과 석물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은 강릉은

서울시내에 있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으면 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