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을 내려와
남원에서 일박을 하고 하동으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안내판이 훅 지나간다.
운조루 안내판이다.
내가 늘 보고 싶어하던 '他人能解'
가 쓰인 뒤주가 있는 그곳 운조루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를 돌려 운조루로 들어간다.
어리숙한 눈에도
'금환락지'의 명당이란 말이
썩 어울리는 곳에 위치한다.
기세가 좋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뒤산과
섬진강을 낀 너른들판을
업고 안고 있으니 말이다.
'내 고향이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금환락지
옛 지사(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잡은 구례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음(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성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명혈(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가락지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 행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금환락지' 라는 곳은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다.
현재 토지면(土旨面)의 지명도 본래는
금가락지를 토해 냈다는
토지면(吐指面)이었는 바
모두 이와 같은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운조루참조>
99칸짜리 양반 가옥답게
행랑채의 긴 칸살이 보이는 운조루,
연지를 지나 들어간다.
오래된 고택답게 입춘방이 아름답다.
이제 이런 방을 보는 것도 참 어려운 시절이다.
행랑채 문을 들어가니
가을 햇살 받은 운조루 사랑채가 반긴다.
오래된(1782년) 나무의 질감이 따스해서 좋다.
나는 한옥 구조나 그런 것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이런 느낌을 좋아한다.
닳고 땜질한 이 느낌말이다.
또 작은 문을 통해 바라보는
담 너머 담이 있는 풍경도 좋아하고,
오래 되었지만 반들거리게 닦아놓은
우물마루의 느낌도 너무 좋아한다.
가을날 감 주렁주렁 달린 풍경은
마치 어릴 적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라서 좋다.
이런 풍경에 취해 있다가 방 안을 들여다본다.
오래된 벽장문의 글씨는 알아볼 수 없지만
그 느낌만은 연륜이 묻어나고,
비록 저 가구들이
그 시절(유이주가 집을 짓던)의
물건이 아닐지라도 좋다.
저 개다리 책상의 느낌만 해도 얼마나 우아한지...
사랑채 구경을 마치고
안채로 들어가는 공간에서 만난
그 유명한 뒤주다.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행랑채에 백미 두가마니반이 들어가는
목독[쌀독]에 쌀을 담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사람이
쌀을 빼다가 끼니를 해결 할 수 있게 하였다.
고 한다.
그 마개에 '他人能解'라고 써놓았는데
누구나 마음대로 쌀독의 마개를 열 수 있다.
는 뜻이다.
얼마나 멋진 말이고
조선시대 양반의 실천철학인가!
운조루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됐다고 전해지니
지금의 부자들과는 대조적이라
그 뜻은 더욱 빛난다.
운조루 뒤주가 지금은
비록 예전의 자리가 아닌
안채로 들어가는 문간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정신은 만고에 빛날 것이다.
200여년이 넘는
지금의 이 모습을 간직하고서 말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도 닳고 달았다.
얼마나 많이 이 문을 여닫았으면
이렇게 닳았을까 싶다.
지금도 그곳의 안주인은
장독대를 닦고 마루를 닦느라 여념이 없다
저 많은 장독에는 구수한 된장이 익어가고
잘 익은 된장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물이 된다.
그런 바지런함이
이 운조루의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꿈에도 보고 싶던 그 뒤주를
우연찮은 기회에 보게 되었다.
오직 그 뒤주를 본다는 생각으로
다른 부분을 보는 것에
소홀했던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200여 년 전
이웃들에게 끝없이 베풀었던
주인의 아름다운 뜻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만도
행운이란 생각이 든다.
운조루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볼수 있습니다.
'여행 > 전라도 둘러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의 다리가 있는 순천만국가정원 (0) | 2018.12.06 |
---|---|
한옥의 지붕선이 아름다운 천은사 (0) | 2018.11.19 |
바위 터널을 지나야 만날 수 있는 향일암 (向日庵) (0) | 2018.11.15 |
후원이 아름다운 곡전재 (0) | 2018.11.08 |
노고단과 지리산 자락에서 힐링이 되다 (0) | 2018.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