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진이야기

소나무작가 배병우

렌즈로 보는 세상 2007. 12. 3. 08:57

소나무·바다·섬·계곡 등을 소재로 한국의 정서와 역사의 원천을 사진에 담아 온 배병우를 소개한다. 평범한 소재지만 탁월한 심도와 실감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의 소리와 대기를 느끼게 하는 서정적 풍경 사진의 대표주자다. 일상의 상념을 씻어 주는 대자연의 치유력이 넉넉히 묻어 있는 그의 사진 세계를 조명한다.

“지금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그 작품과 맞서는 듯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과 공명 또는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지구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쳐버렸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타고난 힘도 상당히 약해졌다. 그렇기에 더욱 배병우의 사진에서 느끼는 것 같은 치유력을 지닌 예술이 요구된다. 그의 작품 앞에서 천천히 심호흡을 해보자. 금방은 모른다. 그렇지만 조용히 그리고 차근차근 우리들의 거칠어진 정신을 고쳐 줄 것이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마구치 유미는 배병우를 자국에 소개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설득력 있는 말이다. 야마구치는 내심 지쳐 있는 것은 단지 지구만이 아니며, 현대미술 앞에 서 있는 모든 관객들이고, 바로 그들의 심신이 치료를 요할 만큼 병들어 있다고 말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아울러 야마구치는 오늘의 관객들은―적어도 일본 관객들은―환경 문제를 고발하는 충격적 작품이나 단지 눈요기를 위한 과시하는 구경 거리에 식상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더 건강하고 신선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현대미술 역시 성형수술하지도 않고, 분화장이 짙지도 않은 미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셈일까.

새벽의 햇살 사이로 용솟음치는 소나무 숲, 혹은 맑은 물이 샘 솟는 계곡 어귀나 무한히 펼쳐지는 바닷가로 성큼 우리를 초대하는 듯한 그의 작품들은 비록 미술관에 걸려 있더라도 그 이미지의 현장감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때 현장이란 재현된 어떤 것으로서 다가온다기보다는 현실 그 자체처럼 다가온다. 작가가 그 풍경을 이렇게 보여주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 풍경을 그렇게 보았다고 하기 어려울 그런 풍경으로….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는 우리들을 대신해서 말이다.

파리 바스티유의 한 화랑에서 치뤄질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 이 작가에 대해 이방인들이 쏟는 관심의 초점도 야마구치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서구의 관객들 또한 잘 짜여지고, 빈틈없는 이론으로 무장된 현학적인 현대미술과 그 이미지들에 짜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덩달아 그것을 흉내 내는 주변국의 작가들보다는 이를테면 때묻지 않은 이교도적인 참신함에 대한 갈증이 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효험’에 대한 이런 기대는, 현금을 켜 사울 왕의 두통을 진정시키곤 했다던 다윗의 전설 이후로 늘 간절한 것이기도 하다. ‘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약’을 주는 예술에 대한 오랜 희구말이다.

배병우의 사진은 현대미술에 지친 관객들에게 자연의 참신함과 치유 효험을 전달한다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염증이 고조에 달했던 금세기 초의 ‘아방가르드’미술이 마치 사람들에게 사약과도 같은 것이 되어 반성을 촉구했다면, 이제 세기말인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쓰디쓴 약보다는 정갈한 약수 한그릇을 받아들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소나무 숲과 해변과 계곡의 바위나 돌덩이를 찍는 작가로 공인된 이 작가의 작품들은 우선 서구적인 풍경화나 풍경사진의 시각을 빗겨 나가려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어떤 점에서 서구의 풍경 이미지는 전경을 채웠던 주제들을 텅 비워 내는 과정을 겪으면서 발전해 왔다. 수세기 동안 전경을 차지하고 전경의 우위를 주장했던 성모와 천사, 야수와 비너스, 공주와 농부들이 그 자리를 떠나면서 바위며 숲, 호반과 대지는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자연은 화면 속에서 전경을 가득 채웠던 신화와 전설을 걷어 내는 방식으로 한숨을 돌리고, 햇살과 비바람과 달빛으로 분장하는 자신의 운명과 자태, 희로애락을 드러낼 수 있었다.

풍경사진 또한 초상사진이 지배했던 전경의 우위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밝고 심도가 깊은 렌즈가 개발된 뒤에야 등장할 수 있었던 사진에서의 풍경은 우선 유화의 구도와 스타일을 답습했고, 전경은 종종 화면 종심의 중앙에 즉 중경에 자리잡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더구나 사진은 처음부터 자연의 전체성을 담기 어려운 부분이요, ‘단편’적 이미지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으므로 가능한 한 공간이 넓고 깊어 보이는 이미지에 대한 집착 또한 유난스러운 것이었다. 나중에 근접 촬영법으로 세부를 고도로 정밀하게 고립시켜 보여주는 경우에 전·후경의 표현을 통한 공간감의 표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물과 자연의 전체성을 환기시키려는 수사학적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재를 뚜렷하고 당당하게 전경에 부각시키는 수법은 그리 흔치 않았다.

배병우의 작품들은 전·후경이 서로 주제와 부제에 따라 배치되고 분리되는 방식이 아닌, 또 전경이 후경의 품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전경이 후경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렇듯 과장된 전경은 관객을 그 풍경의 문턱에 서성이게도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일점 원근법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의 해체에 있다. 이제 이 풍경은 카메라 파인더에 한쪽 눈을 박고서 바라보는 그런 풍경이 아니다. 이 풍경은 작가가 바라보던 시점에 맞추어 혼자서만 바라볼 때 그 깊이와 실감을 드러내는 그런 풍경이 아니다. 자연이 그렇고 전통적 산수화의 세계가 그렇듯이, 이 풍경은 여럿이 나란히 서서 자리를 다투지 않고 함께 보아도 무방한 그런 풍경이다.

자연이 그렇고 산수화가 그렇듯 그의 사진은 여럿이 다투지 않고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일점원근법에 의한 무대장치적 시각으로 재현된 화면 앞의 객석에는 S석과 A, 혹은 B석의 구별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무대의 막처럼 전경을 가로막아선 이 이미지의 세계에서는 그 구별이 없다. 또 어떤 점에서 그 화면은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아 선다. 작가는 이를테면 원근의 법칙에 따라 다스려진 목가적이며 이상향을 닮은 풍경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검은 수건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자연의 공기와 소리를 머리 속에 그려 가며 즐겨 보라고 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규모가 크다는 점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의 사진들은 사진의 수사학 가운데서도 가장 필수적인 것 가운데 하나인 제유법에 기대고 있다. 사실 사진 이미지의 표현 가능성은 그 사실적 재현력이나 복제 가능성 이외에도 촬영·현상·인화 등의 고유한 일련의 기법 속에서 드러나는 특유의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로 사진 이미지의 고유성을 그 이미지를 읽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의미 부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지만―이를테면 그 시간성의 차원에―사진 제작 과정 자체에서 발생하는 수사법은 수공적인 여타 예술과는 다른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대상을 상대적으로 크거나 작게 과장할 수 있는 축소와 확대를 오가는 이미지의 변신이야말로 사진 이미지만의 고유한 어법이요, 즐거움이라고 할 것이다.

또 오랜 관례에 따라 보통은 수평 구도 속에 가두어지기 마련인 풍경이 수직 구도 속에 들어섬으로써 기왕에 전경에 배치된 소재는 더욱 묵직한 인상을 자아내게 되며, 화면의 폭이 좁혀진 이러한 전·후경의 거리감은 급격한 속도감을 유발해 낸다. 이와 같은 파격적인 비례의 수직 구도는 주제를 기념비적으로 제시하려는 인물 혹은 정물 사진에서 이따금씩 수용되는 것이긴 했어도, 풍경의 경우에는 예외적이다. 서구의 풍경화에서는 18세기의 일부 비주류 화가들이 이런 구도를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통적 산수화의 구도를 닮은 화면이 반드시 사진 이미지에서도 마찬가지의 시각적 효과와 직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계곡의 암석들의 주름이, 뭍에서 물로 이어지는 수목과 하늘이, 소나무 숲 사이로 얼비치는 햇살과 안개는 여전히 화면을 어떤 식으로든 채우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그림에서와 같은 넉넉한 여백, 화면의 주변을 사각의 형태로 자르기를 거부하는 진정으로 텅 빈 공간과 같은 것은 사진 이미지 속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사진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리 텅 빈 모양을 띤다 하더라도 어차피 화면 주변의 여백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은백색 입자로 덮혀지고 채워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풍경이 수직 구도 속에 들어섬으로써 전경에 배치된 소재는 더욱 묵직한 인상을 자아낸다.

흔히 흑백의 대조가 강렬한 사진이나 하늘과 같은 텅빈 공간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사진 이미지에서는 대단히 까다로운 일임을 작가들은 잘 알고 있는데, 이는 주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최근에 단조로운 수평 구도 속에 명멸하는 빛의 반점―오징어잡이 밤배의 자취―만을 보여주는 작업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거꾸로 이전의 작업과 같은 전경은 없다. 오직 후경이 있을 따름이다. 수평선상에, 둥근 지구의 저편에서 솟아오르는 불빛을 기다리며 그는 밤바다에서 밤을 지새곤 했다고 한다. 기이한 강태공이고, 국적과 세월을 바꾼 콜롬부스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란히 그의 어깨 뒤에 서서 그 풍경을 함께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밤배의 불빛들은 마치 우리가 예견했던 바와 같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소실점으로 빛난다. 여기에서는 공간의 깊이를 암시하기 위한 시각적인 피라미드 선상의 어떤 형태도 무용지물이다. 한 개의 소실점이 아니라 여러 개의 소실점으로 빛나는 불빛들은 그 흡인력으로 또 먹빛의 바다와 그 반사면에 불과한―이 흑이 백을 반영하는 매혹적인 역설이다―하늘의 거대한 부피를 암시하려 한다.

그는 제유와 과장의 수사학 대신 생략과 희생의 수사학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또한 별들의 운행이 화면 위에서는 부드럽게 휘어진 선분이 되어 지나가듯이 사진 이미지에만 고유한 함축법이다. 한때 아주 코앞의 이미지를 주시하던 작가가 지금은 아주 머나먼 수평선 너머를 탐내고 응시하는 동안, 우리의 눈이 원시안임을 탓했던 우리는 다시금 깜짝 놀라 근시안임을 한탄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모처럼의 서울나들이에서 그분의 소나무 사진을 만났다. 리움에서

왜 그의 사진이 소더비나 크리스티에서 잘 팔리는지도 어렴풋이 알것도 같다.


-배병우는 1950년 전남 여수 출생. 홍익대와 동 대학원 졸업. 5회 개인전 개최. 풍경을 넘어서전, 한국사진의 수평전, 사진 오늘의 위상전, 사진-새로운 시각전 등 국내외 전시에 참가. 사진집으로 《배병우 작품집》 《마라도》 《소나무》 《종묘》, 역서로 《사진의 실제》 《사진 디자인》 등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일본 국립근대미술관에 작품 소장. 현재 서울예술전문대 교수.




▲ 작품 감상

경주

-<경주>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92 ①





경주

-<경주>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92 ②





경주

-<경주>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92 ③





마라도

-<마라도> 치바크롬 프린트 1985 ①





마라도

-<마라도> 치바크롬 프린트 1985 ②





제주도

-<제주도>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92 ①





제주도

-<제주도>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92 ②





제주도

-<제주도>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92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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