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옛날 옛날에

김치에도 등급이 . . .

렌즈로 보는 세상 2010. 12. 23. 11:26

 

 

얼마 전 제철의 맛있는 배추로 일년 먹을 양의 김치 60포기를 담고 나서 몸살이 난적이 있었는데, 

사시사철 배추가 흔해빠진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그렇게 김치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되겠건만,

그 욕심의 근원은 순전히 김치냉장고 때문이었다.

 

김치 냉장고에 김치를 보관하면 일년 동안 두고 먹어도 늘 한결같은 맛을 유지한다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해서이다.

 

 나는 김치냉장고 때문에 김장을 많이 했지만

어릴 적 우리엄마는 농사지은 배추를 갈무리 하는 방편이기도 하고

열 식구 겨울 반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김장을 했었다.


 대체적으로 우리 집은 200포기 쯤의 김장을 한 것 같은데

( 그 때는 비료도 마음대로 사서 쓸 수 없는 형편이라 요즈음처럼 배추가 잘 되질 않았다.)

그 김치에도 등급이 있었다.

그 때 우리는 김치를 간을 짜게 하였다고 "짠지"라고 불렀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엄마는 곧 김장준비를 하기 시작하는데,

 먼저 여름부터 정성들여 키운 배추를 깨끗이 다듬어서 속이 꽉 찬 것은 4등분 하고, 그보다 조금 못한 것은 2등분,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은 포기 채로 천일염에 절여놓는다.

 

그리고는 양념을 준비하는데 요즈음처럼 젓갈을 듬뿍 넣어 감칠맛 나는 그런 양념이 아니라

농사 지은 맏물 고추는 구남매 키우고 가르치느라 여름에 벌써 장에 내다 팔고

맏물이 아닌 두 번째 쯤에 딴 고추를 빻은 고춧가루와 소금,

마늘과 생강 재피가루를 찹쌀죽에  반죽하여 버무려 둔다.

그렇게 준비한 양념을  다 절여져서 씻어 물을 뺀 배추와 함께 버무린다.

이 때 우리 집의 김치는  등급이 매겨지게 된다.


 먼저 속이 노릇노릇하게 꽉 찬 배추는 포기짠지라고 하여

무채와 갓, 검은 참께로 속을 넣어 버무려 중 단지에 넣어서 땅에 묻어 보관하여 두고,

사돈이 오거나 큰일이 있을 때만 상에 올렸다.

 

두 번째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푸른 잎이 거의 없는 배추를 숭숭 썰어서 앙념을 해 중 단지에 넣어서 땅에 묻어 보관하여 두고,

평소에 우리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오면 김치를 꺼내 먹는 그런 김치였다.


 마지막으로 푸른 잎이 많고 속이 차지않은 배추를 우리는 "퍼드럭배추"라고 불렀는데,

그 배추는 숭숭 썰어 남은 양념이 많든 적든(대체로 양념이 적어 불그스름 했음)

그것들을 모두 버무려 어른 키만큼 키가 큰 독에 넣어 정지 가까운 그늘진 처마 밑에 보관해 두고

우리들의 겨울 내내 밑반찬으로 했다.

 

 그 큰 김칫독에서 푹 익은 김치는 식량을 절약한다고 하루에 한 끼는 끓여먹던 벙그래죽(콩나물 갱죽)을

끓일 때는 없어서는 안 될 재료였다.

 

 

 모든 물자가 모자랐던 시절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는 한 예로 우리 집 김치는 그렇게 등급이 있었고,

양념이 적게 들어가 배추 천연의 맛이 그대로 우러났던 그 맨  밑 등급의 김치는 우리 남매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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