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진이야기

유섭 카쉬전을 보고 . . .

렌즈로 보는 세상 2011. 4. 5. 23:13

유섭 카쉬가 누구냐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고 할 만큼 사진가들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을 아느냐는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안다고 말 할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직접 처칠을 본 것은 아니지만 처칠의 사진을 보고 그를 알아본다.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을 찍은 사진들은 많지만

의자에 앉아 화난 얼굴의 블독 같은 처칠의 모습은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한 사진일 것이다.

바로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유섭 카쉬다.

 

유섭 카쉬1908년 아르메니아 공화국에서 태어나 17세에 캐나다로 건너가 활동한 캐나다의 사진가이다.

사진사에서 "인물 사진의 교과서"로 평가 받는 사진계의 거장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만으로도 20세기 정치인, 영화배우, 예술가, 문학가 등 모든 사람의 내면을 발견하여 사진으로 기록하는

 "영혼을 찍는 사진작가"로 불렸으며

조명과 자연광을 조화시켜 인물을 부각시키는 그의 독창적인 조명 기술은 현대 사진조명 업계에 큰 업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2002년 7월, 93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5만 여장의 인물사진을 찍었던 카쉬는

 전 세계를 무대로 수많은 인사들을 그의 카메라 앞에 당당하게 세운 사진작가이다.

 

카쉬전은 2009년 3월 예술의 전당에서 첫 내한 전이 열렸고 2년 만에 다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를 한다.

 이번 전시에는 윈스턴 처칠과 마더 테레사,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등 20세기 역사의 주역들과

오드리 햅번,넬슨 만델라와 샤갈, 엘리자베스 테일러, 앤디 워홀 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초상도 전시되었다.

 

이 번 전시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빈티지 프린트로, 은염 사진이 귀한 요즈음에 흑백사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그들의 마음, 내면, 영혼에 담긴 위대함을 찍는 것이다."란 말과

"셔터를 누르기 전에 바라보고 생각하라, 가슴과 마음이야 말로 진정한 렌즈인 것이다."란 말은

인물사진을 하는 내가 크게 공감한 말이자

교훈으로 삼아야 할 말이다.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내가 특히 감명을 받은 몇 작품을 올려본다.

 

 

 현장에 가보니

"이제는 훌륭한 사진도 예술로 대접 받는 시대이니 열심히 하라."라고 말씀하셨던 대학원시절 은사님의 말씀을 절감했다.

이 삼십분을 기다려 입장하여 줄을 서서 밀려가면서 관람 할 수 있었으니까.

 

  오드리 햅번(1929-1993)

영화 <로마의 휴일>로 일약 스타가 된 그녀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지금도 만인의 연인이다.

그녀가 27살에 헐리우드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여리고 감성이 풍부한 그녀의 내면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카쉬는 그녀의 남다른 재능과 특별한 성공의  이유를 확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내면에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열정이 녹아있어, 그 것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고 회고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1875-1965)

 

슈바이처는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이자 신학자이며 음악가이다.

어린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음악을 전공했으나

후에 프랑스 선교단을 통해 아프리카 흑인들을 돌볼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촬영 당시

카쉬가 슈바이처에게 기독교의 십계명 중 가장 위대한 계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슈바이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스도는 오직 한 계명만을 주셨습니다. 그건 바로 사랑입니다."

 

세기의 성자다운 말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1932-2011)

카쉬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영화 <내셔널 벨벳>으로 이제 막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14세 소녀였다.

소녀의 풋풋함과 겸손함을 간직하고 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매력은 카쉬의 사진에 잘 나타나 있다.

 크리스찬 디올(1905-1957)

프랑스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디올은 튤립라인,A라인, H라인 등의 패션 아이콘을 탄생시켰다.

 

카쉬와 그가 만났을 당시인 1954년은 디올은 새로운 매장을 오픈 하기 얼마 전이었다.

새로운 디자인이 유출될까 걱정했던 디올 측은 그의 작은 사무실에서의 촬영만 허락했다.

시대의 유행의 리더였던 디올은 평범한 수트를 입고 있었다.

어딘가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그의 매너는 매력적이었고,

한 예술가로서의 절제된 영국인의 모습과 동시에 프랑스인 고유의 느낌도 가지고 있었다.

 

 카쉬는 칸막이 벽 뒤에 그를 세워 얼굴의 한 부분과 한쪽 눈만 보이고 입술에 손가락을 얹게 해,

비밀스러운 일을 꾸미고 있는듯한 무언의 디올을 표현하여 신비로운 그의 내면을 잘 살려내었다.

 재클린 케네디(1929-1994)

카쉬가 재클린 케네디를 처음 만났을 때는 1957년 뉴포트의 그녀의 어머니 집에서였다.

당시, 메사추세츠 출신의 상원이었던 존 F. 케네디의 매력적인 아내 재클린 케네디는

앞으로 일어날 남편의 죽음을 비롯한 역경과 고난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카쉬의 작품 속

동양의 기품 있는 자개 가구 앞에 선 재클린 케네디는 멋스런 가구와 조화를 이룬 우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당시 불과 20대 후반의 나이지만, 그녀의 맑은 눈빛과 하얀 어깨는 새하얀 드레스와 어우러져 성숙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마더 테레사(1910-1997)

카쉬가 한 평생을 성인으로 존경 받아 온 테레사 수녀를 만난 곳은 캐나다 오타와의 대주교의 저택에서였다.

오타와 대주교의 주택에서는 테레사 수녀를 귀빈으로 여기며,

성대한 오찬을 준비하였지만 정작 그녀는 점심상을 물린 채 부엌에서 식사하기를 고집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테레사 수녀는 후원자들이 만들어놓은  빠듯한 스케줄로 지쳐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오로지 해야 할 일만을 향해 달리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인물이었다고 카쉬는 말한다.

 마르크 샤갈(1887-1985)

카쉬가 프랑스의 대 화가 샤갈을 만났을 때, 샤갈의 나이 이미 80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쉬는 촬영 당시 그림 속 등장인물처럼 편안한 자세의 자연스러운 포즈를 요청했다.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이웃집 편한 할아버지처럼 포즈를 취한 샤갈은 그의 그림 속 이야기처럼 행복해 보였다.

 

환상과 신비가 융합된 독자적 개성을 표현한 그는 주로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로 유명했던 그는 색채의 마술사라 불려지기도 했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그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카쉬는 "사실 악몽과도 같았다." 고 고백했다.

떠들썩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캔버스가 가득한 넓은 방들을 누비고 다니는 것 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서의 촬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카쉬는 미술관에서 나중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200파운드가 넘는 장비를 갖추고 미술관에 도착한 카쉬를 본 미술관 관계자들은

 "피카소는 절대 오지 않을 겁니다."라며 입을 모았으나

그는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 산 셔츠까지 입고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다.

카메라 렌즈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알아서 구도를 잡아주는 피카소의 모습은 젠틀하기까지 했다.

 

피카소는 당시 사진가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카쉬는 독특하게 그에게 어울리는 소품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고민 끝에 , 늘 여성이 함께했던 피카소의 인생처럼

여체가 그려진 도자기 소품을 이용해서 상측 정면광을 이용해 강하게 표현했고,

 그 결과 피카소의 예술과 인생역정이 사진 속에 녹아날 수가 있었다.

 

호안 미로(1893-1983) 

초현실주의 특유의 어두운 느낌은 배제하고 화려한 색깔들로 내면의 판타지를 그려냈던 호안 미로.

그러나 카쉬와의 첫 만남에서 호안 미로는 휴일에 은행가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소극적이고 조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밝고 생동감 넘치는 호안 미로의 작품세계와는 달리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카쉬는 "호안 미로에게 작업복을 입히자 그의 아이 같은 재치와 유머러스함이 사진에 나타났다."고 촬영 당시를 회고했다.

호안 미로가 가진 특유의 예술성을 이끌어내는 매개로 작업복을 선택한 카쉬.

이는 카쉬가 인물을 잘 해석하고 그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윈스턴 처칠(1974-1965)

윈스턴 처칠은 카쉬의 업적에서 빼 놓을 수없는 인물이다.

인물사진가로서 카쉬의 명성이 바로 처칠과의 촬영을 기점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41년, 카쉬는 그의 후원자였던 캐나다의 수상 맥켄지경의 주선으로

 캐나다를 방문한 영국 수상 처칠을 촬영하기 위해 연설자 대기실에서 카메라의 조명을 준비해 두었다.

연설을 마친 처칠이 대기실로 들어오자 카쉬는 조명을 켰고, 정황을 모르는 처칠은  크게 화를 냈다.

카쉬는 처칠에게 양해를 구하고 의자에 앉혀 촬영하려 했으나 그가  시가를 내려놓지 않고 투덜거리자

카쉬는 용서를 구하며 시가를 입에서 뺏어냈다.

처칠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듯한 억센 표정을 지었고 바로 그 때 카쉬는 셔터를 눌렀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처칠은 곧 인자하게 웃으며 " 한 장 더 찍으시게"라고 말했고 카쉬는 웃는 그의 모습도 기록했다.

이 번 전시장엔 그 사진도 있다 .

 

그러나 그 웃는 모습의 사진은 이 사진 만큼 아우라가 없다.

명작은 그렇게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다.

촬영 후에 처칠은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을 찍게 할 수 있군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이 "으르렁거리는 사자"가 된 것이다

 

카쉬의 그런 배포를 닮고 싶다.

 

만 레이(1890-1976)

미국의 사진가이자 화가인 만 레이는 1924년경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초현실주의를 접하면서 사진에 의한 빛의 조형에 흥미를 가지게 된 만 레이는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다 직접 피사체를 배치하고, 피사체에 빛을 비춰 나타나는 추상적 영상인 레이요그래프 기법을 창안했다.

 

카쉬와 만 레이는 파리에 위치한 만 레이의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다.

만 레이는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가볍게 웃어넘겼던 대인배였다.

그런 만 레이를 카쉬는 '독창적인 예술가이자 사랑스러운 멋진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촬영하는 동안, 만 레이는 "나한텐 문제란 없어요.해결만 있을 뿐이죠."라며, 수없이 많은 것을 창조하고 개척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

조각가이자 화가인 자코메티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1922년 파리로 건너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철사와 같이 가늘고 긴 조각상을 다수 제작하며 독자적인 양식을 이루었다.

 

카쉬가 자코메티를 만났을 때, 자코메티는 디에고를 조각한 작품들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카쉬는 고뇌하는 자코메티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2주 후, 자코메티는 예상치 못했던 죽음을 맞는다.

 

카쉬는 자코메티와 함께 했던 어느 하루를 회고하며

"자코메티를 촬영한 후, 그와 함께 유명한 예술가의 아들 피에르 마티스를 만났다.

그 날의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고요해서 마치 자코메티의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더욱 짓누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조지아 오키프(1887-1986)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는 내가 사진 공부를 할 때

사진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알프레드 스티클리츠의 아내로 언듯언듯 비춰지던 그녀의 빼어난 자태 덕분에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카쉬도 오키프의 친구들이 말하는 그녀의 빼어난 자태 때문에 촬영을 결심했다.

 

카쉬가 찍은 이 사진은 아비퀴우에 있는 그녀의 집(현재 조지아 오키프 박물관)에 걸려있다.

사진은 역시 내가 생각했던 그녀를 너무너무 잘 표현한 작품이다.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20세기 최고의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은 다른 사진작가들의 촬영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오로지 카쉬만을 고집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코네티켓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타난 번스타인은 좌절감에 휩싸여 매우 불안한 모습이었다.

지난 밤 제 3세계의 음악가들과 밤 늦게까지 통화하며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느라 한숨도 이루지 못했던 번스타인은

 촬영 도중 이런 말을 남겨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음악이 만들어내는 유대관계가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제한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사진 속 인물의 내면을 끄집어내기로 유명한 카쉬는 번스타인과 촬영에서도 끓임 없이 대화를 시도하며 촬영을 이끌었다.

카쉬는 그 날을 떠올리며

"당시 번스타인이 나를 위해 들려주었던 그의 작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There's a Place to Us'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워 방안의 모든 사람들을 눈물짓게 했었다."고 전했다. 

글렌 굴드(1932-1982)

1957년 카쉬가 토론토에 위치한 글렌 골드의 집에서 촬영을 진행할 당시 그는 단 한 순간도 피아노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당시 굴드가 연주했던 음악은 바흐와 알반 버그의 음악이었는데,

카쉬는 "그연주에 푹 빠져 카메라와 조명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굴드는 잦은 순화공연으로 인해 작곡활동에 집중할 수 없어

연주활동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결국 1964년을 끝으로 공개연주회를 마쳤다.

그 후 작곡, 레코드 촬영에 힘썼는데, 굴드는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공연에서 얻을 수 없었던 완벽함을 얻었다고 한다.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1899-1961)

카쉬가 헤밍웨이를 만난 것은 그가 자살하기 4년 전이었다.

카쉬는 헤밍웨이가 쓴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을 두루 갖춘 그의 모습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쿠바의 하바나 근방 '핑카 히바야'라고 불리는 집에서 살고 있던 헤밍웨이는

 이제껏 그가 찍었던 인물들 중 가장 수줍음을 많이 탔으며, 묘한 친밀감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헤밍웨이는 네 번째 아프리카 원정 여행 당시 발생했던 비행기 사고의 휴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카쉬는

덥수룩한 수염과 소박한 스웨터를 입은 헤밍웨이의 모습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냈다.

 

촬영 전날 저녁

카쉬는 수줍음 많은 그를 철저하게 사전 조사를 할 요량으로

그가 즐겨 찾았던 '라 플로리디타'라는 바를 찾아가 그가 주로 마시던 다이키리를 맛보았다고 한다.

헤밍웨이를 만나기로 한 다음날 아침 9시 , 카쉬에게 그는 무슨 음료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카쉬는 추호도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다이키리라고 말했다.

이 대답을 들은 헤밍웨이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아니 카쉬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그걸 마시겠다고?"

카쉬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어제 저녁에 당신에 대한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봐요.'

위스턴 오든(1907-1973)

1930년대 영국 시단의 중심인물로서 크게 활약한 오든의 시는 크게 두 가지의 상반된 주제로 나뉜다.

하나는 핍박받는 빈민의 비참함과 비정한 사회에 대한 양심을 드러내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가로서 개인적인 염원을 담은 작품이다.

 

카쉬는 오든을 스티븐 스펜더라는 시인의 정원에서 촬영했다.

당시 두 사람은 '귀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뉴욕에서 생활하던 오든은 향수로 인한 우울증으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오든은 끓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이미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쉬는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오든은 심한 기침 때문에 이야기를 멈추곤 했지만, 그의 황폐해진 얼굴 이면에 감춰진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월트 디즈니(1901-1966)

1901년에 태어난 미국의 애니메이션 제작자 겸 영화감독이자 사업가인 월트 디즈니는

'미키마우스' 시리즈를 내놓으며 주목을 끌었고,

937년 첫 장편 컬러 만화인 '백설공주'에 이어 '피노키오' '신데렐라' 등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카쉬가 그를 만나러 간 디즈니랜드는

한 사람의 상상력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놀라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저 있어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카쉬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입구에서 촬영하는 디즈니의 모습에서 강한 CEO의 모습이 아닌 마치 소년과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마서 그레이엄(1894-1991)

모던댄스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미국의 무용가 마서 그레이엄은 데니손무용단에서 활약했다.

독무와 군무를 합하여 140여개 이상의 작품 활동을 하였다.

 

카쉬가 그레이엄을 만난 것은 1948년 뉴욕에서였다.

카쉬는 그레이엄의 아파트에 들어간 순간 냉혹할만큼 소박한 공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대 무용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처럼  현대적인 디자인의 탁자 위에는 나무 화석이 있었다고 한다.

카쉬는 그레이엄의 촬영 장소를 어떠한 장식도 없는 곳으로 정했다.

그레이엄은 좁고 낮은 공간에서 춤추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나 포즈 만큼은 완벽했다고 한다.

좁은 방 안 의자에 앉아있을 뿐인데도 춤을 추는 것 같았던 그레이엄을 보며,

카쉬는 그녀 본인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르 코르뷔지에(1887-1965)

카쉬가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코르뷔지에를 만난 곳은 파리에 있는 그의 자택이었다.

코르뷔지에는 자택 안 작은 나선형 계단에 기대어 카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코르뷔지에는 그 계단을 만드는데 200불 밖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적은 비용으로 훌륭한 계단을 만들어 낸 것을 그가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코르뷔지에는 규모에 상관없이 그의 모든 작품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고 회고한다.

 

코르뷔지에는 세계적인 근대합리주의 건축의 흐름에 서양건축의 고전주의 미학을 잘 조화 시킴으로써

 콘크리트 건축의 새로운 흐름을 개척한 위대한 건축가로써

한국 건축계의 거장인 김중업도 그의 밑에서 공부했었다.

작업을 하는 유섭 카쉬

 

전시기간은

2011년 3월 26일(토) - 2011년 5월 22일(일0

 

티켓은

    성인 9,000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6,000원
세종유료회원 1000원 할인(등급별 할인 매수 적용)
인터파크(TIKI) 유료회원 할인 10%
단체 10인 이상시 매당 1,000원 할인 (1544-1555 예매)
그 외 할인은 현장 구매시 적용.
(만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우, 외환카드 소지자...)
각 할인을 확인할 수 있는 확인증서 지참 시 할인이 가능합니다. (학생증, 경로우대증, 복지카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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