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모곡

어머님의 수첩

렌즈로 보는 세상 2011. 7. 25. 12:38

 

 

어머님과 함께 며칠을 묶고 왔습니다.

제 시어머님은 올해 연세가 여든 둘 되시고 말띠십니다. 

 

적지 않은 연세임에도 자식들에게 외롭다 아프다 하시며 스트레스 주는 일 절대 없이

혼자서도 참 재미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가끔 내려가도

아침 드시면 당신 가시는 복지관이나 노인정으로 출근하시기 바쁘시고

멀리 있을 때는 전화를 드려도 전 날 저녁에 시간 예약하고 전화를 드려야 통화를 할 수 있을 만큼 바쁘십니다.

그런 어머님을 보면서 나도 노인이 되면 저렇게 살아야되는데 하는 생각은 하지만 자신이 없다.

 

어머님은 열 아홉에 시집을 오셔서 홀 시어머님을 오십 여년을 모시고 사셨다.

우리 시조모님은 혼자 세파를 헤쳐오셔서 성품이 보통이 아니시고

또 외아들인 아버님은 할머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깐깐하시기가 보통이 아니셨다 .

그런 두 어른 밑에서 평생을 기 한 번 못 펴시고 사셨다.

아니 기만 못핀게 아니라 그 억눌려 지낸 세월 때문일까

어떻게 보면 멍청해보이기까지 하셨다.

 

그런 어머님께서 11년 전에 할머님 돌아가시고 그 2년 후에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니

처음엔 조금 외로워하시더니만 이내 어머님 생활을 하기 시작하시는데

그 열정이 보통이 아니셨다.

 

어머님은 옛날에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으셔서 글을 제대로 읽고 쓰실 줄 모르셨던 모양인데

복지관에 가시면서 한글 반에 들어가셔서 한글도 배우시고

산수도 배우시고, 장구도 배우시고

이제는 한문과 영어까지 배우신다.

 

젋은 사람들처럼 가르치는 걸 모두 받아들이긴 쉽지 않겠지만

어머님 나름대로 읽을 수 있는 수첩도 가지고 계시니

그 성취감과 즐거움에 하루하루가 가는 게 너무 빠르다고 하신다.

 

그렇게 사시는 어머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식들은 저런 생활을 오랫동안 하실 수 있기만을 빌 뿐이다.

 

절약이 몸에 벤 어머님은 공책 한 권도 선뜻 사지 않으시고

막내 손녀가 남긴 걸 쓰신다. 

 

공책안은 어머님의 예쁜 글씨로 빼곡하다.

젊어서 공부를 하셨으면 글씨체가 참 이뻣을 것 같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하셨다는 선생님은 참 꼼꼼히도 체크해 주신다. 

 

요 쓰기 공책은 한문 공책이다.

한자도 반듯반듯하게 쓰신다. 

 

요건 음악공책이 아니고 영어공책이다.

그런데 소문자가 좀 이상하다.

 

이렇게 모든 과목을 열심히 하십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숙제를 하시느라 밤 이슥토록 공책과 씨름을 합니다.

 

그런 씨름 덕분에 어머님은 이제 어머님만 알아보시긴 하지만 어머님의 수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일일이 써 드리지 않아도 당신 스스로 기록하는 수첩 말입니다.

 

그럼 어머님의 수첩을 한 번 보실까요?

참 재미난 부분들이 많습니다.

훗날 어머님을 기억할 때 즐겁게 이야기 하는 부분이겠습니다.

첫 장을 넘기면 요런 재미난 글들이 적혀 있습니다.

이로일(일요일), 열로일(월요일),

 

미용실과 면장님댁 전화번호도 있습니다.

글이야 어머님 알아보시면 되고 전화번호만 맞으면 뭔 문제 있습니까?  ....

 

양조장 사장님은 반사장님이신 모양입니다.

아니지요. 혹시 박사장님이신지도 모릅니다.

 

 안도(안동), 항미(향미)

하나씩은 빠뜨립니다.

 

 경동보이라, 김병신,

뒷면에 보니 김병신이 아니고 김병식입니다.

 

저기 보이는 형임은 대구에 사시는 어머님의 손위 동서를 말합니다.

 

저기 보이는 배설사도 좀 의심스럽습니다

 

제주도는 또 요렇게 적어두셨습니다. 어머님의 마음의 안식처인 절 이름은 정확합니다.

 

우리가 집으로 올 무렵 어머님이 막내에게

 

"거 식탁 우에 감기약 가지고 온나"

라고 하셨습니다만

막내는 감기약이 없다고 말합니다.

 

 "가기안"

어머님이 요렇게 적어놓으셨으니 어떻게 찾겠습니까?

한 참을 헤멘 끝에 이거냐고 물으며 가져온 감기약 봉투를 보고

막내는 웃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웃음 뒤엔 할머니를 좋아하는 막내의 마음이 있다는 걸요.

이 번에 들어올 때도 할머니의 선물이 가장 값진 것이 던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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