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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기품있는 소호헌

렌즈로 보는 세상 2012. 5. 22. 09:30

 

안동에 살면서 의성 시댁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지나쳤던 도로 옆에 있는

날아갈듯한 기와집이 그들먹한 동네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그곳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물이 소호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차에서 내려 자세히 구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지만 기품있는 건물 소호헌에서

예전 안동문화를 공부할 때 이론으로 배웠던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본다

 

 

 

 

재래식 모판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기계식 모판을 바라보며

앙고속도로 남안동IC로 빠져나와 5번 국도를 타고

조금 남쪽으로 내려온 도로 가에 소호헌(蘇湖軒)이 있다.

 

 

초여름 오후 햇살에 소호헌의 작지만 기품있는 모습이 고요하다.

                                                                

소호헌은 조선중기에 지은 별당건물이다.

본래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의 이명이

그의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를 분가시킬 때 지어준 집인데

이고에게 아들이 없어 그의 사위인 함재 서해가 집주인이 되었다.

서해는 명종 때 사람이며 대구 서씨로  이황의 문인이다.

 

오른쪽이 소호헌 건물이고 왼쪽이 약봉선생의 태실이 있는 안채이다.


대구 서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조선 명종 때 함재 서해에서 비롯되었는데,

한양에 살던 함재 서해가 안동의 고성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옛날 이 마을 서쪽에 넓은 호수가 있었고, 고려 때 시랑을 지낸 소씨(氏)가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소호리(蘇湖里)라고 하였다고 한다.

 소호헌(蘇湖軒)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정자와 사랑채, 독서실 기능을 겸한 소호헌에는

고전적 기품과 낭만적 운치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여덟 칸의 마루와 두 칸의 온돌방을 정(丁)자로 연결하여,

형태상으로도 힘과 권위와 화려함이 드러나 보이는 건물이다.

 

 

소호헌은 1920년대 근대교육의 일직서숙(一直書塾)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권오설이 강학하고, 대구 서씨에서 운영자금을 댔다고 한다.

 

 

주춧돌 위에 기둥을 직접 세우지 않고 평방 모양으로 기틀을 짜 돌린 뒤 그위에 기둥을 세운 누마루 기둥

 

 

소호헌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쪽에서 바라본 누마루

두리기둥은 옛날부터 있던 것이고

사각기둥은 중수하면서 다시 세운 기둥이다.

 

 

 

 

 누마루에서 바라본사랑방

 

 소호헌 누마루 안쪽의 강당겸 독서실인 마루.

오른쪽의 창호지 바른 문을 열면 소호헌 누마루가 있다.

 

 

세월을 따라 만들어진 문에 난 구멍도

 갈라진 문도 문을 잠그는  잠금고리도 하나의 작품이다.

 

 

강당 안에는 약봉선려(약봉선생의 누추한 집)이라는 현판과 함께 많은 현판이 걸려있다.

 

 

소호헌의 오래되어 아름다운 건물의 느낌은 앞쪽에서보다는 서쪽면에서 볼 수 있다.

 

 

400년이 넘은 건물에서 뿜어져나오는 연륜이 넘어가는 햇살에 더욱 아름다운 소호헌 건물

 

 

소호헌은 앞쪽에서 보는 느낌보다 뒤쪽에서 보는 느낌이 더 아담하다

 

소호헌 안으로 들어오는 문의 그림자 너머로 계끗하게 정비된 굴뚝

 

회 칠한 벽에 냐려앉은 추녀의 그림자도 꿈틀거리는 담의 지붕도 한옥을 보는 즐거움을 준다..

 

 

 

소호헌 안쪽으로 들어가는 대문 용마루 막새 부분에 새긴 쌍비룡문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소호헌 동편에 있는 건물은 함재 서해의 아들인 약봉(藥峰) 서성(徐渻)이 태어난 곳이다.

 그래서 건물 내에 '약봉태실(藥峰胎室)'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함재 서해는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지만 , 23세로 아깝게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을 하나 보았는데,

바로 5도 감사에 5조 판서를 역임한 약봉(藥峰) 서성(徐渻, 1558~1631)이다.

그는 바로 여기 소호헌 내당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정묘호란 때 각각 왕을 호종했으며,

동부승지와 승문원 부제조, 지의금부사,

도승지와 5개도의 관찰사, 병조와 형조 그리고 호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헌, 경연성균관사,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율곡 이이와 송익필 선생의 문인이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 소호헌 은행나무 -

소호헌 앞마당에는 나이 든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270년이 되었고,

높이는 10m, 나무둘레는 3m에 이른다.

 함재 서해가 심었다고 전하는 은행나무인데,

나무의 나이가 함재 서해가 살았던 시기와 서로 맞질 않는다.

아무튼, 세월은 흘러 사람들은 사라져도 소호헌과 이 은행나무는 남아 지나온 세월을 말해 주는 듯하다.

 

 

 

 

 

 

도로가 생기기 전같으면 미천이 한눈에 보였을 소호헌

햇살 옅어진 저녁무렵의 마당이 깨끗하다.

처음 시댁을 드나들었을 때는 지금처럼 깨끗하게 관리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남대문이 불에 탄 후에 관리인을 두고 있으니 이렇게 깨끗하게 관리되는 게 너무 보기좋다.

 

 

후원에 어느 관리인이 만들어놓은 것 같은 보물 제475호 소호헌이란 글귀.

이 말이 오래도록 후손들이에게 전해졌으면하고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