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안동 아지매의 서울 구경

울창한 소나무 숲에 누워 지아비를 그리다.

렌즈로 보는 세상 2012. 9. 28. 10:41

 

 

이제까지 내가 아는 태릉은 선수촌이 있는 곳이었지만

이번에 큰딸이 태릉쪽에 이사를 오면서 태릉이란 곳을 알게 되었다.

 

이삿짐 정리가 거의 끝난 오후에 찾은 태릉에는 선수촌도 있었지만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의 둘째계비 문정왕후 윤씨를 모신 릉인 태릉이 있었다.

 

잠시 태릉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자

 

태릉

 

 

•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565년(명종 20) 4월 7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승하하자 4월 12일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능호를 신정릉이라고 했다가 6월 4일 태릉으로 고쳤다. 7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예장했다.

•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봉은사 주지 보우와 상의하여 지금의 서삼릉에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 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하고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배전(拜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릉 입구에 서있는 태릉과 강릉의 안내도이다.

태릉과 강릉은 사적 제201호로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태릉 가는 길은

궂이 능을 보지 않더라도 태릉의 격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격조를 지닌 숲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40기의 능 중 하나인 태릉의 전경이 고요하다.

초가을 평일이라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일까 그 고요함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맨 오른쪽 건물이 건물이 능지기들이 거쳐하던 수복방이고

그 옆의 작은 건물이 비각이다.

가운데 큰 건물이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이고 정자각 뒤로 문정왕후의 능이 보인다.

 

 

 

이왕 태릉으로 들어가는데 궂이 옆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 홍살문 앞에 선다.

여기서부터 신성한 구역이라고 표시하는 문인 홍살문.

붉은 살이 있고 기둥으로 되어있어 홍살문이라 이름한다는 이 문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가본다.

 

 

 

정자각까지 곧게 뻗은 길은 각양각색의 돌로 되어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이곳에 몸을 누인 문정왕후를 생각해본다.

 

 

 

문정왕후 윤씨 (1501년 ~ 1565년)

 

• 문정왕후는 1501년(연산군 7) 10월 22일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뒤인 17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인종이 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자, 기존의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소윤(小尹)과 기존의 세자를 지키려는 대윤(大尹) 간의 권력싸움이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 이 가운데 1544년(중종 39)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는 걸로 당쟁이 일단락되는 듯 싶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정권은 경원대군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로 넘어왔다.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형을 포함한 소윤 일파는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그 후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 권세를 누리던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춘추 65세로 승하하였다.

 

 

 

 

 

문종왕후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정(丁)자 모양의 건물인 정자각.

능을 보러 갈려면 나의 허락을 맡고 가라는 듯 서있는 모습이 늠름하다.

 

 

정자각을 올라가려는데 마지막 넘어가는 햇살이 기와로 된 바닥에 쏟아진다.

마치 정자각에 마지막 기운을 불어넣고 넘어가려는 것처럼 말이다.

 

 

정자각 문앞에 서니 문정왕후 윤씨의 묘 태릉이 마주 보인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때면 능은 항상 저런 모습으로 의연하게 후손들을 마주하리라....

 

 

정자각 안의 제상.

옛날 문정왕후가 승하하셨을 때도 이런 덮개가 씌워져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신성해보이는 느낌을 주기에는 좋다.

 

 

정자각 뒤에서 바라본 홍살문

 

 

정자각의 어처구니.

 

멧돌을 돌릴때 쓰는 나무막대를 어처구니라고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옥의 지붕에 사람이나 갖가지 기묘한 동물들의 모양을 한

토우(土偶 : 흙으로 만든 인형)들이 한 줄로 늘어서있는 것도 어처구니라고 한단다.
주로 경복궁같은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殿閣)이나 남대문같은 문루의 기와지붕에 있다.

 여기도 왕후의 능이니 어처구니가 있다.

 

 

 

 

태릉은 어디에서 바라봐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함께한다.

솔향기 솔솔나는 그곳에 묻혀있는 문정와후가 부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남편인 중종이 죽자 친정을 등에 업고 아들을 왕(명종)으로 만든 것만해도 과한 복일진대

12살의 어린 아들을 대신해 나라를 8년 동안 좌지우지했으니 욕심이 과하다.

 

그런 과한 욕심 때문일까?

하늘은 그녀를 사후에 남편과 함께 묻히는 영광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남편과 묻히고 싶어했는데도 말이다.

 

여행의 묘미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인지도.......

 

 

 

 

 

 

태릉에는 소나무만 울창한 게 아니다.

아름드리 향나무도 그 향기를 뽐낸다.

우리가  향을 피우는 것은 부정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하여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특히 제사 때는 신을 불러오는 매개체로서 향을 피운다.

그렇다면 이곳에 향나무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태릉의 또다른 건물인  수복방과 비각

 

햇살 가득한 수복방.

예전 능지기들은 이런 햇살을 즐겼을까?

하루종일 풀 뽑고 관리하는 일은 노비들이 하고

아마도 그는 이런 햇살보다 더한 것도 즐겼을 것 같다.

 

 

 

비각

비에는 '조선국 문정왕후 태릉'이라고 새겨져있다.

 

 

해 넘어가는 태릉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앉아서 모임을 하고 있다.

그들도 죽어서 함께하지 못한 지아비를 그리는 문정왕후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해 늬엿늬엿 하는 가을의 초입에 찾은 태릉.

비록 가까이서 능을 볼 수도 없고,

그 능을 둘러싼 질감 투박한 석물들도 만져볼 수 없었지만

소나무 울창한 그 숲에 있는 문정왕후의 이야기는 마음껏 느낄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