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북 둘러보기

퇴계 이황선생의 학맥을 이은 학봉 김성일기념관

렌즈로 보는 세상 2013. 1. 18. 12:38

 

 

국도 5호선을 타고 의성에서 안동으로 들어가는 길목,

안동시내를 들어가기 직전의 작은 고개에 학봉 김성일기념관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학봉선생의 기념관은 운장각이라고 학봉선생종택 한 켠에 있었는데

또 어디에 기념관이 세워졌단 말인가 싶어서 날 저무는 시간에 표지판을 따라가 보았다.

 

 

 

기념관은 학봉종택의 솟을대문 안에서 밖으로 나와 있을 뿐이지 역시 안동시 서후면에 검재에 있는 종택 옆에 있었다.

 

 

 

 

든든하게 큰 바위가 무게를 잡아주고 있는 마당 너머에 새로 지은 학봉기념관이 있다.

운장각에서 학봉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서 건물이  클 줄 알았는데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다.

지키는 사람은 없고 문은 열려있어 그냥 안으로 들어가 본다.

 

 

 

학봉선생 연보.

 

학봉 김성일 선생은 <1538년(중종33)~1593(선조26)>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 호는 학봉(鶴峯)이다.

시호는 문충으로 쓰며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선생의 수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초유사, 경상감사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순국하였다.

 

 

 

학봉선생이 태어난 의성김씨 내앞종택의 사진도 걸려있다.

 

김성일의 아버지는 안동 천전(川前)에 살았던 청계(淸溪) 김진(金璡)으로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 김성일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형제들도 재주가 있어 성일을 포함하여 극일, 복일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수일, 명일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또한 이들은 함께 퇴계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므로 형제 문인으로 유명하며, 당시 ‘천전오룡(川前五龍)’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기념관 안에는 학봉선생이 쓰시던 물건이나 생전에 쓰셨던 문집,

편지글 등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학봉집

<학봉집>에 있는 글들은 대개 시사에 관한 시·문들이고, 학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는

「상퇴계선생문목(上退溪先生問目)」과 「상퇴계선생서(上退溪先生書)」 정도이다.
그 내용은 상장제례의 절차에 관한 세세한 질문이거나 일상적인 문제들의 처리에 관한 질문으로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오래되어 찢어진 글이 있어 읽어보니 나주목사 입안문이다.

1586년 학봉이 나주목사로 재직시 내린 노비소송에 관한 판결문이다.

당시의 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호적의 증명력과 중간확인의 소 절차도 나타나는 등 노비법제의 주요한 사례란다.

 

학봉선생이 나주목사로 재임하면서 목민의 이상을 실천하려고 힘을 쏟으니 왕이

"그대가 밝게 다스리며 송사 판결에 흔들림이 없으니,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은 매우 꺼리나 백성은 편해졌다."

고 하며 상을 내리기도 했단다.

 

 

 

 

학봉선생 자필 시와

왕이 신하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에서 강의하고 토론한 내용을 학봉(鶴峰) 김성일(1538-1593년)이 기록한 경연일기.

 

 

 

유서통, 각대, 가죽신등 학봉선생의 유물이 전시되어있다.

제일 앞에 있는 것이 유서통으로 1592(선조 25년) 4월 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된 학봉이 왕의 유서를 넣어 가지고 다니던 통이다.

양쪽 끝으로 고리가 있어 등에 멜 수 있게 만들었다.

 

 

 

다양한 모양의 신분증 호패도 있다

 

 

 

 

낡은 책상과 임란 때 쓰던 칼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

 

학봉선생이 산음현에서 부인에게 보낸 한글편지

 

이 편지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시는지 심히 걱정이 되오.

나는 산음(山陰, 지금의 경남 산청)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지만,

봄이 내달으면(닥치면) 도적들이 다시 날뛸(침범할) 것이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또 직산(稷山)에 있던 옷은 다 여기에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걱정하지 마시오.

장모님 모시고 과세(過歲)를 잘 하시오.

자식들에게는 편지를 따로 쓰지 못하오. 잘 있으라 하오.
감사(監司)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기약을 할까마는 언제라고 기한을 정하지 못하겠소.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이 없어 이만. 섣달 스무 나흗날.'

 

옛날 유학을 하던 선비들은 가정사에 권위적일 것 같은데 전혀 아니다.

아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상하기까지 하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학문을 한 선비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계학맥도

이 학맥도를 보면 퇴계선생의 학맥이 어떻게 이어져왔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퇴계선생언행록>에서 퇴계선생은

"행실이 고상하고 학문이 정수(精粹)하여, 내가 본 가운데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사람 됨됨이 명민 영특(潁特)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여간해서 얻어 보기 힘든 사람이다."

라고 하며 학봉의 자질, 인격, 학문을 모두 찬양했다고 한다.

<퇴계선생언행록>의 3할을 학봉선생의 이야기와 연관되었다니 사제지간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하였으면 그렇겠는가!

그런 이끌어주고 공경하는 사제관계가 학봉선생이 퇴계선생의 학문을 이어가는 대통을 이어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이어 온 퇴계선생의 학맥은

학봉의 후손인 서산 김흥락선생으로 이어지고

그 선비정신이 조선조 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학봉선생은 일본 침략 문제를 오판(?)함으로써 조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긴다.

이점 때문에 학봉이란 이름이 폄하되곤 한다.

그러나 그는 퇴계선생의 수제자로 조선 성리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몸을 던져 전쟁을 지휘했다.

그리고 그의 학맥을 이어받은 선비들은 다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나라를 구하는 선봉에 섰다,

 

겨울 날 어둑어둑해지는 때에 찾은 학봉선생기념관에서

'역사는 그렇게 돌고 돌면서 흘러가는 것이니 너무 현재에 집착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