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안동 아지매의 서울 구경

매화 흐드러지게 핀 운현궁의 봄

렌즈로 보는 세상 2013. 4. 9. 07:19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이 안동김씨 세도정치 하의 어려운 시절에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둘째아들을 조선 제26대 고종으로 왕위에 올렸던 그 역사의 현장 운현궁(雲峴宮),

그 운현궁을 며칠 전에 들렸다가 입 다물고 있는 매화가 아쉬워

매화 흐드러지게 웃는 봄날인 그저께 다시 들렸다.

 

 

 

안국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만나게 되는 운현궁 입구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집으로서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이다.

지금의 운현궁 건물은 1864년(고종1)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짓고,

1869년(고종 6)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서울시 민속자료 제 19호)을 세웠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 등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북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대원군의 조부)·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활짝 핀 매화가 있는 풍경을 보고 싶어 두 번째 찾은 운현궁,

노락당과 이로당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앞에는  며칠 새 매화는 흐드러지게 피고

그 그늘 아래서는 한복이 곱다.

 

 

 

노안당 앞 화단에도 매화는 흐드러지게 피었다.

 

 

매화 흐드러지게 핀 운현궁에서

여고시절 오빠의 눈을 피해 교과서 밑에 감춰두고 읽었던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을 잠시 떠올려본다.

 

 소설의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안동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왕족들이 처참한 꼴을 당하던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연회자리를 찾아가 상갓집 개 행새를 하던 장면은 참으로 눈물겹다.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면 고기 한점을 주겠노라"

던 안동김씨의 말에 그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고,

침을 뱉어 던진 고기덩어리를 주워먹던 장면 ...

물론 소설 속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어려운 시절에 아들을 왕위에 등극시킬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노력은 이해가 된다. 

 

하긴 그 노력이 자기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

 

노안당은 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곳이란다.

'12세에 왕이 된 아들의 집무를 도울 생각에서 출발했던 모든 논의가

후에는 그의 과한 욕심으로 아들과의 경쟁관계로 치달았던 곳이구나!

사람은 결국 자기를 위해 사는 모양이다.'

는 생각이 잠시 든 건물이다.

 

 

 

 

뒤에서 바라본 노안당

 

1994년 보수공사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는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인 안채로 쓰던 건물 노락당

 1866년(고종3년)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왕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단다.

 

처음 여기서 왕비 수업을 받고 가례를 올렸던 명성왕후는 훗날 시아버지와 원수가 되고 그렇게 죽임을 당할 걸 알았을까?

 

 

 

내가 간 날도 노락당 마당에서는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상에 차려진 음식은 옛날과 같지만

시대가 변해서  외국인 신부를 위해 영어로 통역을 하면서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다.

 

 

 

이로당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와후의 가례가 치러진 이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어 1869년(고종6)에 새로운 안채로 짓게 된 건물이다

 

 

 

이로당 건물은 마루에 문을 단 복도로 다른 건물과 이어주는 특색이 있는 건물이다.

 

 

 

 

이로당 건물 뒤

 

운현궁이라는 이름이 궁의 이름을 땄지만 사대부의 집인 운현궁은

집 주인의 힘에 힘입어 궁궐 내전에 가까운 건물이다.

 

 

 

운현궁의 건물을 드나드는 각기 다른 문들 앞에서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아름답다.

운현궁에서는 지금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복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지금의 운현궁은 건물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다

물론 유물전시관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각 공간마다 조선시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시물로 가득하다.

명성왕후의 부대부인 생신 축하 방문

 

일반적으로 왕비는 궐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부모의 생신,

병문안, 상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 사가를 방문할 수 있었다.

명성왕후가 부대부인의 생신을 맞아 세자를 데리고 운현궁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명성왕후는 당의를 입고 부대부인은 평상복인 치마, 저고리에 마고자를 입었다.

세자는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사규삼을 입었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전북을 입었다.

 

 

 

 

운현궁의 앞뜰에 있는 느티나무 너머로 관리사로 쓰던 수직사가 보인다.

 

만약에 대원군이 살았던 그 때도 이 나무가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길게 드리운 나무 그림자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하니 말이다.

 

 

 

 

 

 

 

매화 흐드러지게 피고 나무 그림자 길게 드리운 날 찾은 운현궁,

만약에 대원군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사대부로 남아

사군자 중 선비정신의 표상이라 일컫는 매화를 그렸다면

지금의 운현궁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