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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땅굴과 평화전망대의 고장 철원을 돌아오다

렌즈로 보는 세상 2013. 5. 27. 06:35

 

 

 

 

지난 광명중앙도서관 또바기 독서회 문학기행으로 철원을 다녀왔다.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는 내려서 보고 왔지만

다른 곳은 전부 버스를 타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하고 온 철원 여행이다.

그렇지만 철원이 우리 중부전선에서 아주 중요한 군사적 요지임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첫번째 철원 여행이다.

 

 

 

우리가 견학을 갈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앞마당에 장갑차와 정찰기가 전시되어 있는 철의삼각전시장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곳에서 신고를 해야 들어갈 수 있다.

 

 

 

 

 

 

품격있는 여행을 추구하는 또바기 독서회에서는 여기서부터 철원군 관광해설사도 함께 동승하여 해설을 들으면서 이동한다.

철의 삼각지대란 6,25당시 처절한 전투가 있었던 철원, 김화, 평강을 잇는 선이 삼각형 모양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여행의 묘미는 이런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란 걸 새삼 느끼면서 제2땅굴로 이동한다.

 

 

 

 

민간인 통제선을 넘을 때 군인이 올라와서 검문을 한다.

어릴 적 같으면 제법 무서웠을 것 같지만 이제 그런 것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도착한 제2땅굴,

우리 일행은 철모를 쓰고 땅굴 안으로 들어간다.

 

 

 

 

제2땅굴(강원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땅굴로

한국군 초병이 경계근무 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시추작업으로 땅굴 소재를 확인한 후,

수십일간의 끈질긴 굴착 작업 끝에 1975년 3월 19일 한국군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발견한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이다.

지하 50m ~ 160m 지점에 있는 견고한 화강암층인 이 땅굴의 총연장은 3.5km인데 그 중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1km까지 파내려왔고,

그 규모는 높이 2m의 아치형 터널로서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 설계된 북한의 도발현장이다.

 

 

 

 

1975년 4월 8일 땅굴을 찾아들어가던 우리병사  8명이 도주하던 북한군이 설치한 폭발물에 목숨을 잃기도 한 제2땅굴은

지금은 커다란 산소공급 관과 바닥에 고무깔개를 깔아 편안하게 다닐 수 있지만

북한군이 땅굴을 팔 때는 이런 산소공급관도 없었으니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을까 싶다.

 

 

 

 

땅굴에는 우리군이 땅굴을 찾기위한 시추공과 북한이 설치한 지뢰지대

북한군이  추격하는 우리 군의 인명피해를 있게했던 다이너마이트 설치구멍도 보인다.

 

 

 

 

 

땅굴에는 북한군이 땅굴이 발견되자 도망을 가면서 우리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설치한 차단막이 있던 곳도 보여준다

땅굴에는 3개의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고

이 차단막을 헐 때 우리군인 8명이 사망한 슬픈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북한의 도발 현장과 우리군의 피해현장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전시관에는 당시 땅굴에서 발견한 군사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저렇게 낡은 모자를 쓰고 땅속에서 일을 했을 작고 까마른 북한군 병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비무장지대의 넓은 철원평야와 그곳에서 자라는 농작물들의 젓줄인 넓고 큰 저수지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평화전망대로 향했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간 평화전망대

오른쪽에 크리스마스 때면 불 밝힌 트리로 유명한 트리탑이 보인다.

 

 

 

전망대에 올라서 바라본 남방한계선 부근,

흐린 날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넓은 철원평야에 기댄 채 해발 395m에 불과한 야트막한 고지였고 평범한 야산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철의 삼각지대 가운데 철원 꼭지점의 어깨부에 해당되는 요충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야산을 빼앗기면 2억평에 달하는 철원평야는 순식간에 적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열흘간 12차례의 쟁탈전 끝에 고지의 주인이 7번이나 바뀌었다. 

1만7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고지에 쏟아진 포탄만 27만5000발에 이르렀다.

고지는 벌집이 되었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아쉽다.

맑은 날이면 북한군 초소도 보인다는데.....

 

 

 

 

전망대에는 궁예의 태봉국도성도를 볼 수 있다.

철원을 기반으로 멋진 나라를 세워보려는 꿈에 부풀었던 애꾸눈 궁예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본다.

철원을 오기 전에는 궁예는 그 산속에서 어떻게 나라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싶었는데

철원을 와보니 그 의문점이 풀렸다.

철원은 산중의 척박한 동네가 아니고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는 풍요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모형으로  군사분계선과 남, 북방한계선, 철원을 철의 삼각지대로 부르는 이유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천안함 사진전도 하고 있어서 그날의 참상도 한 눈에 볼 수 있는 평화전망대다.

 

 

 

지금 우리가 처한 역사현장과 슬픈 과거사를 평화전망대에서 보고 돌아오는 길,

월정리역 앞에 낡은 철마가 눈길을 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이름표를 달고서 말이다.

예전에는 원산으로 가던 기차가 이곳 철원을 지났다는 데 지금은 이렇게 낡은 모습으로 그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내려서 구경을 하고 싶지만 일정이 모자라 그냥지나오는 길,

구철원읍내를 지날 무렵에는 우리근대사를 보여주는 오래된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옛 조선노동당의 철원군 당사 건물이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

1946년 초 북한 땅이였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 리당 쌀 200가마씩을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제 모금과 노동력을 동원 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내부 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인민재판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죽인 사체들도 지하에서 300구 정도가 나왔다고 하니 쓰라린 역사의 현장이다.  

다음에 철원을 갈 때면 이곳은 꼭 들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 근대사를 조명하는 건물이 공존하는 철원,

넓은 평야와 남방한계선이 함께하는 철원,

그 철원을 돌아서 오는 길은 우리의 지금의 역사현장과 과거사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엉겹결에 다녀온 철원, 좀 더 자세히 철원의 느낌을 느끼고 싶어 다시 그곳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