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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세종대왕릉)보다 더 한적해서 좋은 영릉(寧陵, 효종대왕릉)

렌즈로 보는 세상 2014. 5. 26. 06:03

 

 

언제까지 이곳에 살지 모르지만 주면의 이름난 곳은 모두 둘러볼 생각이다.

 오늘은 그 중 한 곳 인 여주의 이름난 곳,

사적 제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효종대왕과 인선왕 장씨 모신 능 영릉(寧陵)을 다녀온 글을 올린다.

영릉(英陵. 세종대왕릉)은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영릉(寧陵, 효종대왕릉)은 처음이다.

시골에 살 던 나도 몇 번이나 다녀올 정도이니 세종대왕릉은 언제나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에 비해

효종대왕릉은 덜 알려진 주인 때문인지 그 곳보다 조용하고 한적해서 좋았다.

비록 까까이서 석물을 볼 수는 없었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보면

'효종대왕릉은 원래 동구릉(東九陵) 원릉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석물에 틈이 생겨 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여주 영릉(英陵) 옆으로 옮겼다.

1674년 인선왕후의 능이 같은 장소에 택정되어 왕릉 앞에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게 했다.

 왕릉에만 곡장(曲墻)이 있어 앞에 있는 왕비릉과 쌍릉임을 나타내주는 것 이외에는 비릉도 단릉(單陵)과 같이 모든 석물을 갖추고 있다.

앞뒤로 쌍릉을 이룬 것은 풍수지리상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에 양릉을 두고자 한 데서 연유했다.

이 능은 회격(灰隔) 바닥에 지회(地灰)를 깔고, 병풍석을 생략했다. 그외 석물의 양식과 배치상태는 조선 전기 〈국조오례의〉의 능상설양식을 따르고 있다.'

고 되어있다.

그런 영릉을 구경해보자.

 

 

 

평일이라서 그런지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조용한

효종대왕릉도 일반적인 능의 배치와 같게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정면에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 앞 양쪽에 제사를 지내는 음식이나 제기를 보관하는 곳과 노비들이 묶는 건물이 있다.

그 건물들 위로 비스듬한 능선에 능이 있다.

풍수에 대해 문외한인 눈으로 보기에도 왕릉이라 역시 명당이다.

아름드리 소나무 우거진 능은 따사롭고 편안하다.

 

 

 

 

들어가면서 오른 쪽에 있는 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守僕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일종의 관노가 거처하던 곳이다.

 

 

 

 

 

수라간

제사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는 곳이다.

수복방이나 수라간 건물이 깨끗하다 싶더니만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05년 7월 발굴조사하여 2006년 복원하였단다.

 

 

 

 

정자각

왕릉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건물이 丁자 모양이라 정자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정자각 안에는 세 개의 상이 있다.

음식을 차리는 제사상과 향을 피우는 향상, 그리고 축문을 올리는 축상이다.

 

 

 

정자각의 상차림과 제향일정

매년 6월 23일(양력) 효종대왕 제향일이나 3월 30일 인선왕후 제향일에 이런 상차림으로 향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향사나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것은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왕릉에 제사 지내는 모습은 또 어떨지 궁금하다.

 

 

 

 

정자각을 지나면 동쪽에서 만나게 되는 비각.

'조선국 효종대왕릉' 이라는 비문은 보이지만 크게 화려하지는 않고 점잖고 묵직하다.

 

 

 

 

정자각 뒤 서쪽에 있는 예감(瘞坎)

잔디 사이에 우물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뭔가 싶었는데 제사가 끝나고 철상(제사 음식을 치움)을 하면서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사진 윗부분에 두 능침이 보인다.

위쪽이 효종대왕릉이고 아래쪽이 인선왕후릉이다.

쌍릉인데 나란히 있지 않고 앞뒤로 있는 건 풍수지리설 때문이란다.

능력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좋은 땅 좋은 곳에 묘까지 쓸 수 있지만

능력 없는 사람들은 살아서도 좋은 땅 좋은 곳에 터를 잡기가 힘이 드니 참......

 

 

 

 

인선왕후 능에 물을 주고 있다.

능침에 물을 주다니 어쩐 일인지 궁금하다

 

 

 

 

왠 일인지 봉분에 잔디가 벗겨져있고 물을 주고 있는 걸 보니 다시 잔디를 심은 모양이다.

왕비의 능이니 얼마나 신경을 썼을까마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사인 모양이다.

왕비의 능에도 석물들이 대단하던데 더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효종대왕릉

낮은 산에 둘러싸이고 또 아름드리 소나무로 둘러싸인 능의 위용이 대단하다.

혼유석을 중심으로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호, 석마 등 웅장한 석물들은

인선왕후의 능과 차이가 없지만 능을 둘러싼 곡장(담)이 다르다.

왕의 무덤이니만큼 왕비의 무덤보다 더 보호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망원렌즈를 가지고 가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가까이에는 가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효종대왕에 대해 알아보자

효종대왕은 16대 임금인 인조의 차남으로 맏이인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죽자 세자로 책봉되어 1649년부터 1659년까지 재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아버지 인조는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찧는 굴욕을 당하였다.

당시 봉림대군이었던 효종대왕도 이듬해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가 청나라에 8년간 머물렀다.

이때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청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가진 신하들과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효종대왕은 북벌이라는 큰 꿈을 이루지 못한 채 41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지만

대동법 실시와 화폐단위 개혁은 물론 양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바로잡는 기틀을 마련한 업적 또한 작지 않다.

 


 

 

 

사람들 발걸음이 적어서 한적한 효종대왕릉을 보고 내려오다가

평생 문화재쪽의 일을 한 남편은 다시 한참을 보고 있다.

이렇게 내려오다가도 다시 보고싶은 효종대왕릉,

이러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밖에 없는 조선왕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