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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한 솔향기에 취했다 온 세종대왕릉(英陵)

렌즈로 보는 세상 2014. 5. 30. 06:00

 

 

나는 세종대왕릉을 이번까지 세 번을 다녀왔다.

먼저 두 번 다녀온 기억도 솔향기로 가득한데 이번에도 역시 향긋한 솔향기에 취했다가 왔다.

능 주인이 한글을 창제하신 훌륭하신 분이라 솔향기는 더 진하고 향기로웠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합장되어있는 영릉 뒤 곡장 너머에도 소나무가 울창하다.

 

 

 

 

효종대왕릉에서 넘어와서 바로 보이는 곳도 아름드리 소나무로 울창하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은?

 

사적 제195호인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 보이는 북성산까지도 소나무로 가득한 곳이다.

 

 

 

 

 

능의 역사는?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정자각이나 관노들이 거처하던 방, 수라간까지도 소나무를 곁에 두지 않은 건물은 없다.

 

 

 

 

 

능을 오르고 내리는 길 어디에나 아름드리 소나무로 울창한 영릉(英陵)은 녹음 짙어지는 지금이 향기 더 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