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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지도자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렌즈로 보는 세상 2014. 9. 1. 07:16

 

 

 

내 기억의 저편에 어슴푸레하게 남아있는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가였고 좌익인사로 암살되었다는 정도였었다.

그러나 그저께 양평의 몽양여운형기념관 및 생가를 방문하고 나서

그분은 내 기억보다 훨씬 큰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3.1운동을 기획하고

일제를 제압한 웅변가로서

세계의 혁명가와 교류하였던 몽양.

건국을 준비했던 선견지명과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을 통한 건국을 이루고자 노력한 부분은

그가 비운의 지도자라서 더 대단하다. 

 


 

몽양여운형 기념관 및 생가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신원역에서 500m 정도만 가면 있다.

 

 

 

신원역에서 몽양기념관까지 가는 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진 돌이 있다.

주자'유객문' 을 인용한 글이다.

사람이란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글이다.

선생께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에게 이런 글로 화답을 한 걸로 보아서

선생은 늘 정당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굳은 신념을 말해준다.

 

 

 

 

 

숲길을 찾아 들어간 곳에 있는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은 인적 없이 조용하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선생이 잊혀져서일까?.

앞쪽 현대식 건물이 기념관이고 뒤쪽 기와집이 생가이다.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서는

지금 특별전으로 '여운형 사진전' 과 '광복절 기념 사진전' 을 하고 있다.

 

 

 

 

양평군민도 국가유공자도 아닌 우리는 2,000원을 내고 입장권 두 장을 샀다.

그리고 팜플렛 하나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팜플렛에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 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2011년 11월 27일 개관했단다.

왜 이제야 기념관을 짓게 되었을까?

아마도 좌우가 대립하던 시대를 살았던 선생이

좌측에서 보면 우익이고 우측에서 보면 좌익인 것처럼

그런 분으로 보였던 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해본다.

 

 

 

 

전시관은 선생의 일대기로부터 시작한다.

1886년 음력 4월 22일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

지금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22살의 나이에 이런 결단을 내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결단을 하는 것으로 보아도

선생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의 좌상이 이곳에서는  독립운동(1914~1945)기의 활동상이나

옥중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여운형 선생은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단다.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일본, 국내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파견하고, 자신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전 민족적 만세운동을 준비했단다.

 

 

 

 

또 웅변가로서의 진면복을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말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 건너간 몽양이

도쿄 제국호텔에서 내외신 기자와 각계 인사 5백여 명을 상대로 행한 웅변이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다 울 때를 기다렸다 때가 되어 우는 것이지 남이 운다고 우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조선의 독립운동 또한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결코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에 도취되어 일어난 게 아니올시다.

이제 조선민족은 열화 같은 애국심이 폭발했습니다.

붉은 피와 생명으로써 조국 독립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을 과연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적의 심장부에서 이런 말을 목청껏 하였다니 그 배포가 놀랍다.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면 하라 내각의 사퇴를 불러왔을까 싶다.

 

 

 

 

선생은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1930년 징역 3년 판결을 받고 32년까지 서대문 형무소 와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선조들이 이루어낸 독립된 조국이다.

우리도 지금 나라의 안녕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

각자의 임무에 충실할 때 진정한 애국을 하는 길이리라.

이런 기회에 아내이자 어머니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것을 다짐해본다.

 

 

 

 

1945년 8월 15일 여운형 선생은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위원장을 맡았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보름이 채 안된 시점에

전국에 145개의 지방위원회들을 조직할 정도로

전국의 치안과 행정을 장악함으로써 과도기의 혼란을 방지했다.

이는 일제 말의 사전 준비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여운형에 대한 민중의 신뢰와 지지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란다.

 

 

 

 

1946년 7월 10일 좌우합작을 위해 우익의 김규식과 좌익의 여운형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협의기구.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결정이 전해지자

정치세력들은 이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때 여운형 선생은

“우리가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친소반미도 친미반소도 해서는 안된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 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고 하시면서 민족적 단결을 요청했다.

그는 좌우 합작과 남북 연합을 통해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 통일임시정부가 미·소·영·중 4개국의 지원과 협력 하에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남북을 연합해서 통일을 이루려던 선생의 노력은

1947. 7.19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테러 조직원인

19세의 한지근이 쏜 총탄에 물거품이 되었다.

총탄에 선생이 서거하신 것이다.

 

 

 

 

서거당시 입었던 혈흔이 묻은 상의와 수첩과 은단, 피살현장도.

민족의 지도자이신 분의 마지막 수중에 품었던 것 치고 너무 간소하다.

저 작은 수첩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있을지 궁금하다.

 

 

 

 

그렇게 비운의 지도자로 가신 선생의 장례식은 8월 3일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뤄졌다.

장례식에는 약 100여 장의 만장이 너울거렸단다.

지금처럼 哀悼란 표현을 쓰지 않고

奉悼라 표현한 것이 더 슬프다.

얼마나 위대한 삶이었으면 그런 표현을 썼겠는가! 

 

 

 

 

2008년 해방과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에 서훈되었다.

이 서훈이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을 건립하는 근간이 되었단다.

 

 

 

 

 

기념관 정관재에서 열리고 있는 제 69주년 광복절 기념 특별전

<8.15 그 감격과 환희의 기억 뒤편> 사진전이다.

항복 조인식이 끝나고 일장기가 내려오는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는 것이 기분 떨떠름하다.

우리나라가 독립했는데 성조기가 웬 말인지....

그런데 마지막 환호하는 군중들의 사진은 실제로는 8.15일이 아니란다.

항복은 했지만 총독부와 일본군이 건재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마음 놓고 환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일은 거리가 조용했다고 한다.

 

 

 

 

기념과 매진홀에서는 몽양 여운형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각 시기별로 전시된 사진은 선생의 활동상을 한 눈에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선생의 가족사진에서 북한에서 정치가로 이름났던 여연구씨는 어떤 분인지 모르겠다.

가족이 남북으로 흩어져 살았으니

선생의 가족사도 참 험난하다.

 

 

 

 

기념관에서는 이렇게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몽양선생과 함께했던 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물론 무료이다.

이런 공간은 아이들이라면 더 좋아할 곳이다.

 

 

 

 

함양 여씨가 양평에 입향한 1715년(숙종 41년) 지어진 생가는

몽양 선생이 1886년 출생해서 부친 탈상을 끝낸 뒤 서울로 이사 간 1908년까지 사신 곳이란다.

6·25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2001년 양평 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 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서거 64주년인 2011년 생가가 복원되었다.

 

 

 

 


 

 

선생은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던 모양이다.

집도 가재도구들도 모두 넉넉한 태가 난다.

작은 경대며 축음기는 그 때는 대가집이 아니면 꿈도 못 꾸던 물건들이다.

특히 선생의 면도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 웃음 짓게 한다.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내려다본 풍경이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산산해진 초가을 날씨다.

이런 날 서울에서 전철이나 자전거를 타고 구경 와도 좋을 것 같다.

아름다운 한강을 끼고 달리는 맛에다가

여운형선생에 대해 생각해보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