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강원도 둘러보기

우리나라 최고의 전통가옥 선교장을 만나다.

렌즈로 보는 세상 2014. 12. 5. 07:00

 

 

 강릉의 사대부가

아니 우리나라의 대표 사대부가 주택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강릉 선교장은 늘 만나고 싶었던 주택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리던 선교장을 지난 번 주문진항을 가는 길에 만나고 왔습니다.

99칸이라는 말에 걸맞게 한 골을 꽉 채운 선교장은

그 명성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리라 최고의 전통가옥답게 품격 있는 자태로 앉아있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내도를 보았습니다.

명문사대부가의 주택이라고는 하지만 그 규모가 대단합니다. 

아담한 골을 가득 채운 규모의 선교장은 장원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습니다.

안내도에는 1번은 활래정, 2번은 본채. 3번은 사당, 4번은 초정(녹야원),

5번은 곳간채, 6번은 전통문화체험관, 7번과 8번은 초가,

9번은 홍예헌, 10번은 교육관, 11번 유품전시관, 1번은 가승음식체험관이라고 안내합니다.

우리는 본채를 돌아 활래정으로 내려오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안내도를 보고 들어가니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 상류주택의 모습은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지은 지 300년이 넘었다는데도 멀리서 봐도 제대로 보존된 것 같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우거진 아늑한 뒷산에 둘러싸인 선교장은

모르는 눈에도 명당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1965년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된 선교장,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한국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선교장,

그 선교장의 대문 앞에 섰습니다.

'선교장'이란 이름은

예전에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하여 붙여졌답니다.

대문 위에는 아름다운 서체의 '선교유거'란 편액이

기둥에는 선교장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편액은 소남 이희수선생의 글씨랍니다.

이런 최고의 건축과 어울리는 편액입니다.

편액 아래를 지나 안채로 들어가봅니다.

 

 

 

 

작은 일각문을 지나서  들어간 안주인이 거쳐하던 안채입니다.

1748년 처음 이곳 배다리가 전주이씨 가의 삶의 터전이 되면서 처음 지은 건물이랍다.

오른 쪽에 동별당, 왼 쪽으로 서별당과 이어져 있는데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한 건물입니다.

 

 

 

 

지금 동별당은 수리 중입니다.

그래서 동별당 뒤에 있는 사당에도 들어갈 수가 없어 가까이서  보지 못한 것이 좀 섭섭합니다.

 

 

 

 

안채 왼 쪽에 있는 서별당입니다.

오른쪽 별당건물이 이집의 공부방이었다면

왼 쪽 건물 연지당은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입니다.

선교장의 건물들은 안마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마당은 안채로 들이는 곡식이나 금전을 받을 때 이용하던 마당이라 하여

받재마당이라고 불렀답니다.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와 별당채에서 나와 사랑채로 구역으로 들어가 봅니다.

길게 늘어선 행랑채가 시선을 끕니다.

선교장을 찾는 손님들이나 집사들이 머무는 공간입니다.

공간에 거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리도 길게 늘어섰을까 싶네요.

 

 

 

 사랑채인 열화당입니다.

 이 건물은 1815년(순조15) 이후(李厚, 鰲隱處士)가 건립한 건물이다.

건물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귀거래사(野去來離)」22)의 구절에서 연유하였답니다.

삼형제가 늘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싶다[悅親戚之情話]”

는 의도를 담고 있는데,

즉 ‘전주이씨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랍니다.

건물 앞 동판(銅板)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遮陽)시설을 두어 햇빛을 막을 수 있도록 한 구조가 특이합니다.

조선시대 목조건물이 가장 많은 안동에서는 보지 못한 양식입니다. 

조선말기 러시아식의 건축물로 러시아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 준 것이라 이런 형식을 하고 있답니다.

 

 

 

 

 

사랑채인 열화당에는 이런 누마루가 있고

오른 쪽에 있는 문은 부엌문입니다.

품위가 있어야 할 사랑채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밖에서 볼 수 없게 만든 센스가 돋보이는 곳입니다.

 

 

 

열화당 뒤에 있는 초정 녹야원입니다.

크나큰 건물들에 비해 후원에 있는 정자는 아주 소박합니다.

그 옛날 가을날 이곳을 찾은 선비들은

소나무 그늘에서 백일홍 바라보며 시를 읊었을 것 같습니다.

 

 

 

 

 

서별당에서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                                                      안채에서 사랑채나 대문으로 들어가는 문

선교장의 건물들은 이런 일각문을 통해서 이어져있습니다.

각 공간의 독립성을 유지해주는 문이지요.

건물이 많다보니 이곳에는 대문을 포함한 문이 12개나 됩니다.

 

 

 

 

지금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외별당 앞 장독대에독들이 가득합니다.

집은 사람의 온기가 있어야 수명이 길다고 합니다.

이 장독대만 보아도 지금도 이곳 선교장은 사람의 온기로 가득한 걸 알 수 있지요.

이런 주인이니 이곳이 제대로 보존되는 것 같습니다

 

 

 

 

 

선교장 대문을 나와 오른 쪽으로 가봅니다.

이 초가에서는 기념풍을 팔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홍예헌입니다.

선교장에 장기간 머무는 시인 묵객들이 거쳐하는 곳입니다.

이들과 교류하며 문화예술을 논하고 그들을 지원하던 곳입니다.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 활래정입니다.

열화당을 세운 다음 해인 순조16년(1816)에 이후(1773~1832)가 건립하였는데

현재 건물은 이후의 증손 이근우(李根宇,鏡農)가 고종43년(1906)에 중건하였답니다.

 선교장의 외별당인 활래정은

전면 돌출된 누마루 부분이 연못 안에 설치된 돌기둥으로 받쳐 놓은 루(樓)형식의 건물입니다.

정자이름은 주자(朱子)의 詩 「관서유감(觀西有感)」중

'위유두원활수래爲有頭源活水來’ 중에서 ‘活來’ 글을 따왔다고 합니다.

그 뜻은

' 물이 흘러 들어와서 맑은  호수(湖水)가 되듯이

올바른 학문(學文)을 닦는 길에는 항상  (恒常) 새로운 흐름을 받아 드려야 한다.'  

이 한 구절이 선교장의 주인들이 학문을 하는 자세를 잡아주는 것 같습니다.

누마루가 있는 건물이 대체로 화려해보이는데

이 연지에 연꽃 가득하면 그 화려함은 대단할 것 같습니다.

 

 

 

 

선교장에는 두 동유물전시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유물에서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지요.

유물의 이름 밑에 사용처를 써 두었으면 좋겠더라고요.

우리 같이 나이 든 사람들도 무엇을 할 때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젊은이들이나 어린이들은 더 많을  테니까요.

 

 

 


99칸의 우리 전통가옥 선교장을 다녀와서

늘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어복하고,

꿈에 그리던 모습과 같이 훌륭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라 행복했습니다.

어느 건물을 돌아가도 실망시키지 않던 또 다른 건물로 가득한 선교장,

오래도록 이런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습니다.